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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Oct 12. 2022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아트테크] 4편 빌 비올라의 삶과 작품 세계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아트테크] 4편 빌 비올라의 삶과 작품 세계


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이라 불리는 빌 비올라.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빌 비올라(Bill Viola)는 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이다. 국제갤러리에서 2003년·2008년·2015년 등 3회에 걸친 개인전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에서의 전시로 우리에게는 친숙하다. 작가는 백남준의 조수로도 일한 경험이 있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면, 비올라는 비디오아트를 대중에 널리 알리고, 예술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그는 40년 넘게 삶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 질문과 감정·의식 등을 주제로 한 200점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왔다. 1983년 뉴욕현대미술관, 1997년 휘트니 미술관, 2003년 폴 게티 미술관, 2004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2006년 일본 모리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95년과 2007년 두 차례의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70살이 넘은 빌 비올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비디오아트를 현대미술의 한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한 선구자인 빌 비올라의 삶과 작품 세계를 만나보자.



빌 비올라의 초기작 중 하나인 ‘투영하는 연못’(1977~1979).


                                                        

◇ 물에 빠져 생사를 오갔던 유년 시절의 기억


비올라는 1951년 미국 뉴욕 퀸즈에서 태어나 웨스트베리에서 자랐다. 그의 유년기에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6세 때 익사할 뻔한 순간이다. 다행히 삼촌이 건져 올렸다. 30대가 된 빌 비올라는 푸르고 녹색 빛의 물속이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에 물이 자주 등장하는 건 이 유년의 기억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실험영상학을 전공하며 회화·뉴미디어·인지심리학·전자 음악 등을 배웠다. 비올라는 전자 미디어아트 역사의 거장인 피터 캠퍼스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 초 비디오 작업을 시작했다. 1973년 대학 졸업 후 시라큐스에 있는 에버슨 미술관에서 비디오 기술자로 일했다. 당시 에버슨 미술관은 비디오아트와 뉴미디어 전시를 주로 개최했다. 비올라는 백남준과 같은 당시 유명 작가들의 전시 설치를 도왔다. 1974년 시작된 백남준과의 인연은 1979년까지 이어졌다. 비올라는 백남준이 ‘과달카날 레퀴엠’(1977)을 제작할 때 촬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올라는 2015년 국제갤러리와 한 인터뷰에서 백남준에 대해 “내 평생 그런 분은 처음 만나봤다. 너무 에너지 넘치고 정말 재미도 있고 지극히 아름다운 분이었다. 나이 든 분이나 젊은이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열린 분이고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최고의 분이었다”라고 말했다.


비올라는 작곡가인 데이비드 투도어와 1973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일하며 음악과 음향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이해를 발전시켜 나갔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마리아 글로리아 콘티 비코치가 이끄는 선구적인 비디오 스튜디오인 Art/tapes/22에서 테크니컬 디렉터로 일했다. 1976년과 1977년에 그는 전통 공연예술을 녹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자바, 인도네시아를 여행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녹아든다.


1977년 빌 비올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있는 라트로브 대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교양 미술 담당자였던 키라 페로프를 만났는데, 둘은 서로에게 평생의 반려자가 된다. 비올라와 페로프는 작업에 있어서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페로프는 1978년부터 비올라의 비디오테이프와 설치물을 관리하고 행정 일을 하고 있다.


비올라는 1970년대에 슈퍼8 필름과 흑백 비디오로 작품을 시작했다. 슈퍼8 필름은 1965년 이스트먼 코닥사가 출시한 8mm 필름이다. 기존 필름보다 큰 면적에 이미지를 담아 농도나 선명도가 뛰어났다. 이 당시 비올라의 초기 작업은 비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예술적 가능성을 꾸준히 실험하며, 예술 장르로 개척함과 동시에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와 본질적인 존재 구조’를 탐구했다. 초기작 중 하나는 ‘투영하는 연못’(1977~1979)이다. 숲에서 걸어 나와 물웅덩이 앞에 선 남자가 물을 향해 뛰어들려고 힘차게 도약하는 일순간에 화면이 멈춘다. 자세히 보면 남자를 제외한 주변 풍경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시간을 물질로 파악하고,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담긴 작품이다.


◇ 어머니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


1980년에는 일·미 문화교류 펠로우십을 통해 다나카 다이엔 선사와 함께 불교를 공부했다. 이 기간에 비올라는 소니 아츠기 연구소의 상주 예술가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선(禪) 수행은 비올라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올라는 이때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비올라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칼아츠로 부르기도 함)의 비디오 교과목의 강사가 되었다. 칼아츠는 오늘날 미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 손꼽힌다. 그해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이니 비올라가 비디오아트로 예술계에서 인정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비올라는 ‘나는 내가 무엇 같은지 모른다’(1986)를 통해 죽은 들소나 생선이 썩어가고 이를 다른 생물이 뜯어먹는 과정을 통해 죽음과 생명의 순환을 다룬다. 이미 생과 사를 인지하던 그였지만, 더 큰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다. 바로 1990년 겪게 되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이다. 비올라는 어머니의 임종과 아이의 탄생을 비디오에 담아 ‘통과하다’(1991)라는 작품으로 발표한다. 그는 죽음과 삶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작품 세계에도 반영된다. 바로 ‘느림의 미학’이다.



비올라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참여해 발표한 작품인 ‘인사’(1995).


                                                 

◇ 빌 비올라를 대표하는 ‘느림의 미학’


비올라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된 1990년대 이후부터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에 슬로 모션을 사용하거나 되감기 기법을 적용해 시간을 확장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짧은 기록은 보통 10분 내외의 길이로 늘어난다. ‘인사’(1995)는 비올라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참여해 발표한 작품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폰토르모의 ‘방문’(1528~1529)이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두 명의 여자가 서로 대화하는 중에 갑자기 한 명의 여자가 더 끼어든다. 이 작품은 고정된 카메라로 45초간 촬영된 영상을 10분 22초 길이로 매우 느리게 재생해 보여준다. 느린 속도로 보면 가운데 있는 여성이 다른 여성의 등장으로 극도의 소외를 겪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비올라는 시간의 구조를 일부러 변형시킨 느림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인간 존재를 바라보게 한다.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에서 열린 ‘이우환과 그 친구들Ⅱ-빌 비올라, 조우’ 전시는 비올라의 영상과 영상설치 작품 총 16점을 공개했다. 작품 전체 상영시간이 약 6시간 30분에 달할 정도이니, 비올라가 추구하는 느림의 미학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해볼 수 있다.


화면을 거꾸로 재생하는 되감기 기법은 시간을 뒤로 돌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떨어지던 물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식으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작품 속에서는 마치 신처럼 주무른다. 비디오아트를 하는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채택하고 있지만, 비올라는 디지털 편집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련되고 능숙하게 뉴미디어와 기술을 다루고 있다. 기술은 그저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도구일 따름이다.


비올라는 관람객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에 빠져들게 하며,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 변화 그리고 생각을 하게 한다. 긴 세월 동안 비올라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 세계적인 큐레이터 제롬 뇌트르는 “빌 비올라는 지난 40여 년간 3가지 형이상학적 질문과 싸워왔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셋째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말했다. 비올라는 종이 대신 영상으로 시를 쓰는 시인처럼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답할지는 관람객들의 몫이다.



                                                        

2014년 5월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 영구 설치된 빌 비올라의 ‘순교자(흙, 공기, 불, 물)’ 시리즈 4점.


◇ 살아 있는 거장의 길


1997년 미국의 휘트니 미술관은 비올라의 25년 회고전을 기획하고 국제 투어를 통해 비올라의 작품이 세계적인 미술관에 순회하도록 했다. 가히 살아있는 거장의 행보다. 비올라는 2007년 열린 제5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해변 없는 바다’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이듬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의 의뢰로 비올라는 200만 달러(약 22억 원)를 들여 제작한 ‘순교자(흙, 공기, 불, 물)’ 시리즈 4점을 2014년 5월 영구 설치했다. 유럽의 교회에서 다빈치·렘브란트·카라바조 등 뛰어난 예술가에게 성화 제작을 주문했던 오랜 역사를 잇는 방식이다. 세인트폴 성당은 최소 10년 이상의 회의를 거쳐 비올라의 작품 설치를 결정했다고 한다. 전통 회화가 아닌 비디오아트, 그것도 비올라를 선택했다는 점은 비올라가 살아있는 거장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비올라는 국제갤러리에서의 전시로 내한했을 때 가진 언론사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미디어아트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것은 미래보다 우리가 현재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가히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현존하는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가 어떤 새로운 작품으로 우리에게 찾아올지 기대가 된다.




△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의 활발한 활동 경험과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 본 칼럼은 이데일리에 '[아트테크] 이상미의 미디어아트'로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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