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테크] 9편 미디어아트와 예술가의 쟁점과 기술적 이슈
[아트테크] 9편 미디어아트와 예술가의 쟁점과 기술적 이슈
“기계의 창작물인가? 예술가의 창작물인가?”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캘리포니아주(州)는 미국의 51개 주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이곳은 할리우드, 폴 게티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이 있는 문화와 예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예술대학으로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Arts), 아트센터디자인대학(Art Center College of Design), 오티스 미술대학교(Otis College of Art & Design), 캘리포니아 예술 공예 대학(California College of Arts & Crafts),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San Francisco Art Institute), 예술 아카데미 대학교(Academy of Art University)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현대미술을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캘리포니아에 몇 해 전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2019년 1월 9일 캘리포니아주 교육위원회는 예술교육 성취기준을 개정했다. 미술, 댄스, 음악, 연극 등 4개로 구성한 기존 하위 교과에 미디어아트가 새롭게 추가된 것이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초·중·고등학교는 미디어아트를 5개 하위 교과목 중 하나로 가르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디지털 문화에 대해 효과적으로 참여하고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 미디어아트 역량과 문해력을 갖춰야 한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미디어아트에 대한 학습이 필요함에 따라 캘리포니아주가 발 빠르게 움직인 걸로 볼 수 있다. 200년에 불과한 미국이 세계 최대 강국으로 군림하고 예술 또한 선진국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나라에는 그만큼 더 밝은 미래가 열려있다.
미디어아트는 현대미술의 주요한 장르로 급부상함과 동시에 우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미디어아트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말 못 할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이슈도 존재한다. 미디어아트가 풀어내야 쟁점들에 대해 짚어보자.
◇미디어아트와 아우라
실물로써 원작이 존재하는 예술품은 그곳에만, 그 시간에만 존재하는 현존성을 지녔다. 작품의 유일성과 더불어 그 작품만이 가지는 ‘아우라’(Aura)가 있다고 여겨졌다. 아우라는 ‘분위기’, ‘영기’, ‘신비’ 등을 뜻한다. 하지만 기계적인 이미지의 재현과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작품의 유일성도 사라지고, 아우라 또한 위협받게 되었다. 1936년 독일 출신의 유대계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을 통해 예술과 관련해 사진과 영화라는 새로운 기술 매체가 야기한 미학적인 변화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일어난 결정적 변화를 ‘아우라의 붕괴’라고 정의했다. 산업사회가 시작되고 예술이 기계를 통한 복제가 되기 시작하면서 예술작품의 권위와 아우라가 상실되었다고 본 것이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권위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에서 생겨난다고 했다. 그는 매체 예술에서 미학적 생산의 주체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기계장치임을 주장했다. 그 이후로 아우라는 예술 이론 중 하나가 되어 사진 같은 복제가 가능한 매체는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는 미디어아트도 마찬가지다. 매체를 활용하는 미디어아트는 복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매체를 예술의 표현 도구로 이해하고, 개념과 내용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미술에서는 더는 아우라의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 하나의 유일한 ‘원본’임을 염두에 두고 제작하지 않는 이상 오늘날의 미디어아트는 복제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미디어아트에 아우라가 있으니 없느냐 같은 논쟁은 사실 케케묵은 논쟁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미디어아트에 맞는 새로운 미학이 대두되는 이유다.
◇기계의 창작물인가? 아니면 예술가의 창작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있다. 기계와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미디어아트는 기계의 창작물인가? 예술가의 창작물인가? 이는 소설이나 시를 손으로 직접 쓰는가, 아니면 컴퓨터를 활용해 작성하는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예술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미학적인 의미를 지녔는가 하는 물음이다. 미디어아트는 소프트웨어와 디지털 장비로 구현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아티스트는 예술가와 기술자의 경계에 서 있다.
’딥드림‘, ’넥스트 렘브란트‘, ’아론‘ 같은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원숭이 ’나루토‘도 사진을 찍는다. 그렇다고 모두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사람이나 인공지능 또는 동물이 창작물을 내놓는다고 해서 모두 예술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미학자인 조지 디키는 1971년 ’미학 입문‘(Introduction to Aesthetics)을 통해 예술 제도론을 주창한 바 있다. 그는 “예술 작품이란 예술 제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의해 감상을 위한 후보라는 지위를 인정받은 인공물이다”라고 밝혔다. 예술계에서 인정받아야 비로소 예술품이 된다는 이야기다. 다만, 예술 제도론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근본으로 하는 예술을 법률 제도나 사회 제도처럼 취급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오늘날의 갤러리, 미술관, 박물관 같은 공간에 작품이 전시되기 위해선 예술 제도론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 제도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디어아트는 새로 등장한 예술이다. 모든 미디어아트가 예술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갤러리와 미술관의 문턱을 넘어서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
기계로만 작업했는지, 손을 써서 만들었는지는 단순한 제작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예술은 제작 과정 또한 작품의 일부로 본다. 컴퓨터로 몇 분 만에 뚝딱 미디어아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붕어빵같이 기존에 만들었던 작품과 별 차이가 없다면? 새로움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그저 예술가의 자기 복제에 불과하다. 미디어아트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사진 같은 매체를 활용하는 예술가들도 유념해야 할 지점이다. 예술가 본인이 작품이라고 우긴다고 해서 예술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 스스로 작품을 만든 철학과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야 예술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 빔프로젝터나 스크린에 상영한다고 모두 미디어아트?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다고 해서 모두 예술이 되는 건 아니다. 특히 미디어아트가 인기를 끌다 보니 우후죽순식으로 미디어아트 전시를 선보이는 전시장이 늘고 있다. 최근 미디어아트 전시를 보면 유사 공통점이 있다. 보통 자연을 주제로 하는 전시를 연다. 빔프로젝터로 영상을 상영하고, 사진 찍기 좋은 포토존을 마련해놓고 관람객들을 유인한다. 관람객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은 없다. 이른바 ‘셀피’의 시대가 아니겠는가.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인생사진을 올리는 게 현대인의 일상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인생사진’을 검색하면 122만 개의 게시물이 나온다. ‘인생샷’은 그 두 배가 넘는 254만 개가 나온다. 사진 찍기에 잘 꾸며놓은 미디어아트 전시장과 예쁜 셀피를 찍기 위한 관람객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물렸다. 이러한 전시장에 가보면 미디어아트라고 전시한 영상은 장소만 다를 뿐 대개 비슷하다. 포토존으로 구성해놓은 공간도 대동소이하다.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빔프로젝터나 스크린에 영상을 상영하고 센서를 부착해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영상이 반응한다고 해서 모두 미디어아트가 되는 것일까? 개나 소나 고양이도 다 하는 건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앤디 워홀은 공장(?)을 차려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유명인의 이미지를 대량생산하듯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는 팝아트를 선보였다. 워홀의 팝아트는 하나의 미술사조가 되었다. 고급예술과 대중문화를 결합한 창조적인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이 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는 ‘독창성’이다. 독창(獨創)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것을 모방함이 없이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거나 생각해 냄’이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1분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걸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내놓는 건 모방이나 표절에 불과하다. 미디어아트 전시들이 예술이 되려면 독창적이고 미학적인 의미를 지녀야 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같은 작품을 반복하는 건 같은 말을 반복하는 동어반복과도 같다. 그저 그렇고 그런 작품들로는 더는 관람객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 눈 밝은 관람객들이 늘어간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어도 두 번 연속으로 먹으면 물린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비슷한 미디어아트 전시라면 눈 밝은 관람객들은 대번에 눈치챈다. 차별화이지만 결국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미디어아티스트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미디어아트의 숙제라고 했지만 미디어아트를 행하는 예술가들이 해야 할 몫이다. 미디어아트는 작가들의 창작물일이기 때문이다.
◇ 최신 기술력과 변별력 유지
최신 기술력을 갖추고 작품에 대한 변별력을 유지하는 것 또한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다. 최신 소프트웨어와 기술을 반영하는 미디어아트는 동향을 따라가지 않으면 뒤처지기에 십상이다. 미디어아트의 변천사를 보면 당대의 주요 매체에 영향을 받아왔다. 무쏘의 뿔처럼 나 홀로 작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최근의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작품성을 유지하고 작업을 이어 나가야 한다. 예술가에게 끊임없는 공부가 요구되는 건 미디어아트뿐만 아니라 동시대 현대미술 또한 마찬가지다. 끊임없는 자기 발전과 성장을 요구한다.
말만 들어도 어렵다고? 예술가의 실제 현실은 더욱 어렵다. 누군가 돈을 주고 주문·제작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걸 창작하는 활동이 주를 이루기에 그러하다. 밥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은 상업적으로 변질하거나 다른 이의 취향을 반영하는 유사품이 되기 쉽다. 자신만이 좋아하는 작업을 할 경우에 작가 혼자만 좋아하고 다른 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미디어아트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관람객들과 상호작용하고 예술계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한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로 활동하고, 진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있음을 안다. 자신의 작업을 앞으로 더 끌고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느 분야나 해결해야 할 난제는 있다. 그걸 딛고 일어서도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온다. 계속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 속에서 예술 또한 빛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의 활발한 활동 경험과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 본 칼럼은 이데일리에 '[아트테크] 이상미의 미디어아트'로 연재되었습니다.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453046632526376&mediaCodeNo=257&OutLnkCh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