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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혐오의 소비

by 리상

최근에 뉴스를 보다가 문득 심하게 거북함이 들어서 티비를 꺼버린 적이 있었다. 종종 좋은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어느 누군가가 강력 범죄를 당했다는 소식이나 어느 집단과 집단의 사람들끼리 갈등이 아주 심해졌다는 소식이 우리 언론 보도의 주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이나, 특정인을 혐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소식들을 마구 말하는 모습에 더 이상은 뉴스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이런 이야기들을 쉽게 보고 들으며 살아왔다는 게 새삼 끔찍스러웠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많은 폭력과 혐오를 안고 있다는 점만큼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이렇게 폭력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뉴스를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점이었다. 그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그저 지나쳐버릴 수 있는 데에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떤 작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타인의 소식, 그리고 타인의 불행을 간편하고 자극적으로 다루는 방식의 미디어는 우리가 그러한 자극들에 무뎌지게 하는 것을 넘어서 마치 그것들을 하나의 볼거리처럼 여기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열대에 놓인 물건들을 훑어보듯이 우리는 타인의 불행마저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미디어 매체를 통해 우리는 타인에 대한 혐오를 하나의 상품처럼 유통하고 있는 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소비 지상주의가 도래한 오늘날의 시대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비를 통해 행복을 찾고, 그러기 위해서 일하며 생활하는 우리에게 소비한다는 일은 때로 하나의 영웅 신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소비가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줄 것이라고, 더 많은 소비가 더 큰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흔한 담론들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재화든, 어떤 이미지이든, 그 무언가를 소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일에도 너무 익숙한 듯하다. 소비에 둘러싸여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간다는 점에서 소비는 우리의 생각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의 불행마저 소비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일까. 당장 아무 대중 매체나 미디어에 들어가 보아도 타인의 불행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그 수를 헤어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보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을 나누기도, 누군가를 조롱하고 비판하기도, 누군가를 연민하기도 한다. 그렇게 얼마간이고 자신의 감상을 표출하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것들을 잊고 지나친다. 사람들은 그저 다음번의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가서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마치 하나의 콘테츠를, 또 하나의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골라내어 사용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불행을 다룰 때, 우리는 쉬이 누군가를 악인으로 규정하곤 한다. 어떤 악인 때문에, 또는 그 본인이 악인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불행이 발생했고, 악인이 사라진다면 문제가 전부 해결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악인에 대한 단죄를 바라며 우리는 그 악인에 대한 혐오심을 갖는다. 그렇게 생긴 폭력심과 혐오심은 이유 없이 생기는 감정들과 달리 일견 정당성을 가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 이런 악인에 대한 혐오를 빙자하여 우리는,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타인들에 대한 혐오까지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또 우리의 미디어는 그런 혐오심을 즐길거리처럼 소비하도록 부추기고 있지는 않았을까. 혐오와 같은 감정을 거쳐 악인을 만들고, 그에게 모든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은 쉽고 직관적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아무런 책임 의식을 가질 이유도 없고,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악인을 비판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선량함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타인에 대한 혐오를 거부감 없이 가지고 즐겼던 이면에는 우리 스스로만은 악인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며 우리는 스스로의 삶의 방식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때에 왔나 보다. 타인의 불행마저 소비의 대상처럼 다루는 사회는 폭력과 혐오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우리가 합리화해 왔다면, 그저 방관자처럼 서서 은연중에 타인의 불행을 즐겨왔다면, 가히 혐오의 시대라고 불릴 만한 이 세상을 만들어온 것은 그 어떤 악인도 아니다. 그건 그저 우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만든 이 혐오의 시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 바꿔보는 것이 아닐까. 마음을 닫고,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부정과 혐오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는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런 방법으로나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긍정이 아니고, 타인을 혐오하는 만큼 그는 스스로에게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은 타인도, 스스로도 사랑하지 못하며 혐오와 원망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닫혀있는 그 마음을 조금 열고, 타인과 스스로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더 이상 혐오나 냉소의 감정은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의무를 가진다.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긍정할 수 있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타인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은 타인에게 그러는 일과도 동일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타인에 대한 혐오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진 않았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혐오와 부정을 내보내려는 노력이 우리 삶의 방식을 가치 있게 바꿔주진 않을까, 생각해본 것이다.




슬슬 날씨가 쌀쌀하다. 겨울이 돌아온다는 건 나를 가장 지독하게 붕괴시켰던 어떤 일들로부터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적이 길었던 한 해가 가고 나니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때를 떠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쩌면 스스로를 망가뜨려온 게 나였을지도, 그간 내가 살아왔던 방식은 언젠가는 그런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때, 조금 무너졌었던 나를 혐오하는 듯 보였던 이들도 있었고, 나의 불행을 재미난 구경거리처럼 여기는 듯 보였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토록 느꼈던 적개심과 혐오심은 더 이상 내게 남아있지 않다. 그들이 그러려고 그랬는지는 알 수도 없겠지만, 정말로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더더욱 마음을 닫고, 혐오와 부정 속으로 자신들을 밀어 넣고 있는 데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참 안된 일이다.


그보다도 누군가가 나에게 불행을 주었던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는 불행을 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닫힌 마음으로 살아온 나는 아마 타인들에게도, 또 스스로에게도 그래 왔을 것이다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 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는 다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더 이상은 타인들에게, 또 나에게 상처를, 그리고 슬픔을 입히지 않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해보았다. 그것이 비록 완벽할 수 없을지언정, 혐오와 부정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열어내고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일이 책임감 있고 가치 있는 삶의 기반일 테니 말이다. 그런 마음이 앞으로의 내 삶을 바꿀 것이라면 결국 나의 재건은 전부 나에게 달려있는 일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나아가 타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바꿔나가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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