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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기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

by 리상
부조리의 인간은 이렇게 불처럼 뜨거우면서도 얼어붙은 듯 싸늘하고, 투명하고 한정된 세계, 아무것도 가능한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주어진 세계, 그 한계 밖으로 넘어서면 붕괴와 허무뿐인 하나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그같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로, 그 세계에서 힘을, 희망의 거부를, 그리고 위안 없는 한 삶의 고집스러운 증언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中


건강한 삶과는 다소 멀어졌던 지난해, 그 회복에 대한 열망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어느 날부터 운동을 다니기 시작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꾸준히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기분이 상해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을 했었고, 어느덧 그렇게 한 지 1년째가 되고 있다. 그런 시간이 지나며 이제는 운동이 나름대로 좋은 취미가, 또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렇게 된 건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근 몇 년간 무언가 열심히 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내가 어떤 일에 몰두하게 된다는 것도, 하물며 그 일이 전에는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운동이었다는 것도, 모두 예상 못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운동은 어려서부터 많은 종목들로 접해왔지만, 언제부터인지 그것이 조금 가치 없게 느껴지곤 했었다. 운동을 잘하게 된다고 내 삶이, 또는 이 세상이 달라지게 되는가 하면 그런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 세상은 나의 건강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작동하며, 엄청난 근육을 가지게 된들 삶이 갑자기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운동을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어차피 무엇도 변하게 할 수 없다는 걸 안다면, 그 무가치하고 허무할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일 이유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운동이 취미가 된 지금에까지도 그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운동을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면 그걸 알면서도 운동을 계속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나아간다면, 어떤 일의 결과는 그 일의 가치에 얼마나 영향을 주며,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살다 보니 선택하지 않은 일들이 삶의 거의 대부분을 이루어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열망했을 무언가에 세계가 응답한 적은 없었고 노력은 좌절이나 원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쩌면 운동도 그런 숱한 실패의 일부였을지 모르겠다. 그런 실패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그 이유를 찾아보기도, 더 노력해보기도, 때론 포기해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세계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실패는 이미 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최근에 읽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어떤 절망도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거나, 삶을 포기하게 할 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을 속인 죄로 산 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 무거운 바위를 굴려 산 정상에까지 올리면 바위는 자신의 무게 때문에 다시 산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결국 시지프는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을 한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끝도, 희망도 없는 고통을 강제당했으니 언뜻 시지프가 아주 비참한 상황에 처한 듯 보이는데, 카뮈는 도리어 이런 시지프의 행복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뮈는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오는 시지프의 모습에 주목한다. 바위와 산은 시지프의 노력에도 아무런 도움이나 의미를 주지 않은 채, 그저 굴러 떨어지는 일만을 반복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시지프는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온 힘과 열망을 다해 한 번 더 바위를 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시지프의 열망과 그 열망에 무관심한 세계가 대립하는 모습을 '부조리'라고 카뮈는 명명한다. 만일 시지프가 이 '부조리'의 상태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회피하는 것이고, 그건 정당한 대처가 아니다. 오히려 '부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시지프는 이 비합리적인 세계의 안에서 '부조리'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식하고 반항해야 한다. 그래야 시지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들에 충실히 대처하는 것이며, 인간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하는 시지프를 제안한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을 때, 시지프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다. 산정을 향한 희망 없는 투쟁을 지속할 때, 시지프는 살아있는 인간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시지프는 구원을 바라지도, 희망을 갖지도, 의미를 찾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을 통해 인간적인 가치를 재건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카뮈는 나의 운동도,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시지프의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끝이 없는 산과 바위들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고, 인간의 삶은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니 무의미는 그저 이 세계의 본성이고, 실패는 인간의 한계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절망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는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 '부조리'를 회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삶을 모두 살아냄으로써, 반항하는 인간이 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무의미와 실패로 끝날 나의 운동도 이제는 무가치하지 않다. 그것이 무엇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삶의 방식을 놓지 않는 나는 삶의 무의미를 회피하지 않으며,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희망에 의지하거나, 완전한 절망에 압도당하지도 않는다. 내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나는 내 고통의 주인이다.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일들을 받아들이려면, 그 일들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도, 그 절망과 좌절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건 바위를 산 정상 위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이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것이다. 어쩌면 선택하고 싶었던 그 일들은 처음부터 가질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걸 가질 수 있었더라도 만족하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고, 바꾸어서도 안된다. 우리 인간이 서 있을 곳은 에덴동산도, 지옥의 심판대 앞도 아니라 그저 이 아크로코린토스의 땅 위이다. 이곳에 있을 때만 우리는 자유롭고 존엄하다. 그러니 의지로 가능한 것이 없을지언정 나는 의지해야만 한다. 실패와 고통은 또다시 찾아오겠지만 나는 그곳에 서있어야 한다. 구원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그것이 가능한들 나는 새로운 절망을 맞이할 것이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 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 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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