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삶의 의미
의미를 쫓아다니는 일을 그만둔 지 시간이 꽤 흘렀다. 그래서인지 근 몇 달간은 생각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비슷한 일과를 반복하고, 적당히 즐거운 취미 생활도 하고, 괴로움을 느끼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 많은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운 즐거움이 찾아오길 바라거나 거창한 행복이 없다고 불행해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토록 바라왔던 평안은 이렇게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당장 지금,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편해지고 싶어서 했던 노력들이 서서히 그런 결과로 나타날수록 왜인지 잃지 말아야 할 어떤 것들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것은 삶의 관성에 몸을 내맡기고 살아가는, 무비판적인, 반지성적인, 비인간적인 삶에 가까워져 가는 느낌이었다.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믿어왔고,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가치들을 대가로 얻는 평안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의 '인간적인 가치'들을 오랜 시간 추구해 왔음에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와닿거나 삶을 달라지게 하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는 점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조금 편해진 지금의 상태에 머무르기보다 나를 괴롭게 했던 일들에게로 돌아가는 게 맞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삶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고 들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책은 세상을 지배하는 혼돈 앞에서 끊임없이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듯 보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에 대한 저자의 탐구를 다루고 있었다. 저명한 어류 분류학자였던 조던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 의해 자신이 쌓아왔던 연구 업적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일을 겪는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거나 주저앉기보다 그 자리에서 다시 물고기들을 분류하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찾아온 혼돈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다시 나아간 조던은 더 많은 종류의 물고기를 발견하며 더욱 성공한 학자로 살아갔다. 학자로서 그의 위상은 스탠퍼드 대학의 창립 총장으로서 학교에 남아있는 흉상과,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심리학부 건물, 여러 초상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온 혼돈에 대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저자는 이런 조던의 삶에서 어떠한 구원을 찾으려고 했다. 무한한 우주에서 인간은 티끌처럼 무의미하다고 말한 저자의 아버지와는 달리, 조던은 혼돈과 싸워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힘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를 알고 스스로도 그렇게 다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명망 있는 과학자라는 평과 맞지 않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리고 애써 무시하고 더 큰 가르침을 얻으려던 저자의 마음과 달리 그의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꺼림칙함은 점점 정체를 드러냈다. 조던은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철저하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긍정적 착각" 혹은 "그릿"은 좌절 속에서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물고기의 5분의 1을 발견했던 대단한 과학자였던 그는 동시에 대학 총장이라는 권력을 남용해 동료들에게 교수 자리를 나눠준, 동료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사람들을 협박한, 자신의 권위를 위해 정적을 독살한 범죄자였다. 나아가 그는 앞장서서 우생학을 주장하며 수 만 명의 '열등한' 사람들을 강제로 불임화시킨 악한이었다.
결국 저자는 조던의 일화를 통해 무언가에 대한 맹신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조던이 스스로와 스스로의 사상에 대해 가졌던 맹목적인 믿음이 그와 반대되는 수많은 논거들을 뒤로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해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분류학에 대해 더 알아보던 저자는 이내 물고기라는 생물학적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현대의 분류학자들은 조류나 포유류와 달리 어류라고 불리는 생물들의 사이에는 유의미한 진화적 공통점이 없음을 알아냈다. 실제로 자연이 진화해 온 방식은 인간의 직관적 이해와는 전혀 달랐고,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어류'라는 잘못된 분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비단 조던에 대한 징악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몰이해를 드러낸다. 우리가 세상을 잘 모른다는 점, 우리의 믿음이 얼마든지 오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나아가 삶이 의미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주나 우생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무의미할지 모르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관점에선 인간이 서로에게 유의미할 수 있다. 우생학 사상에 의해 강제로 불임화 수술을 받은 피해자들이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우리가 가치 없다고 치부했던 일들이 희망과 구원을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을 느낀다. 혼돈만을 맹신했던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만큼 존재하는 가치에 대해서도 찾아보자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본인에게 행복을 찾아준 아내와의 이야기로 저자는 책을 마무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실망스럽기까지 했던 부분은 책을 통해 얻어보고 싶었던 삶의 의미에 관한 부분이었다. 저자가 새로운 관점을 얻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행복을 발견한 건 좋은 일이겠지만, 의미의 차원에서 해결된 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내 눈에 저자는 스스로의 삶이 의미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 무의미에 대해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희망이나 구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p.207)"의 측면만을 보기 위해 그와 반대되는 세계의 진실들을 외면하고 성찰하기를 그만두는 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저지른 오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게 불안정하고 비논리적인 행복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어쩌면 이 책에게 느낀 실망감도 무의미에 대한 내 맹신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는 돈다'나 '신은 죽었다' 같은 아포리즘처럼,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장 역시 진화학적인 사실 전달을 넘어 우리의 시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 부분은 맹신에 관해서였다. 다윈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도 아니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또 인간과 동물 사이에까지도 생각보다 진화적인 차이가 크지 않음을 발견했다. 역사적으로도 인간이 맹신해 온 믿음들에선 대체로 오류가 발견되었고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삶의 무의미가 삶의 무가치로 연역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무의미의 관점에만 집착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삶에서 그런 오류들은 이미 차고 넘쳐 보였다.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해서 얻게 된 자기혐오는 도덕적인 삶의 증거가 아니었고, 기억의 반추는 반성이 아니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들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있었고, 나조차도 나를 망가뜨려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내가 옳다고 믿어온 방식들이 모두 정답은 아니었을 수 있다. 괴로운 일들로 돌아가는 것만이 올바른 삶의 길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게 아닐까.
'파괴되지 않는 것'은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한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그를 계속 가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말한다. 카프카 제시한 이 개념은 밝고 희망차기보다는 다소 어둡고 무서워 보였다. 스스로를 파괴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그 마음은 왜인지 나아가는 일에는 언제나 일정한 대가가 따라온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일도 그와 비슷해 보였다. 그동안은 알지도 못했고,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려면 또 다른 실패를 마주하게 될 것이고, 지금에 얻은 작은 평안도 혼돈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일이 새로운 가치를 찾게 해 줄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오류가 되어 무의미만을 확인시켜 줄지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 건, 여기에 계속 머무른다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 같이, 또 내가 부정했던 사람들 같이 멈춰버리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럴 수는 없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도 이미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러 있었는지 모르겠다. 환상과 환멸, 위선과 위악, 의지와 체념이 되풀이되며 떠내려온 여기에서 오래도 일어나지 못했었다. 어떤 일들은 이미 지나가기도, 어떤 일들은 아직 지나가지 않기도 했지만, 그것들이 나를 단정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제 그런 어제들에서 벗어나 오늘로 나아가려면 환멸도, 좌절도, 무력감도 들어 올려야 한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면 실패와 고통을 기다릴 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찾고 다가가야 한다. 결국 그것이 삶을 이겨내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그럼 우리를 주인으로 만드는 건 새로운 절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