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순직 Nov 10. 2023

고도를 기다리며

95


"인철수도 알고 보면 안타까운 놈이야."


"그만해라. 알고 보면 너도 안타까운 놈이야. 전제를 깔면 아쉽고 아까운 놈이 어디 한두 명이냐? 그러니 죽은 놈 얘기는 꺼내지 마라, 사는 놈 처량해진다."


장욱진은 벌컥 화를 냈다. 나는 뻘쭘해졌다. 햇살은 따가웠다, 토요일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연극은 아직 서너 시간이 남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거냐?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고도가 메시아야?"


김용덕은 미리 챙긴 팸플릿을 뒤적이며 투덜거렸다.


"판도라 상자에서 가장 게으른 놈이 희망이라잖아? 우리에겐 캘리포니아 그녀가 고도인 셈이지."


장욱진은 쓸쓸한 표정이었다, 햇살은 따가웠다. 인철수의 안간힘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는 돌이킬 수 없는 부주의에 나는 밀려오는 아련한 슬픔을 꾸역꾸역 삼켰다. 장욱진의 말처럼 '알고 보면'이라는 전제처럼 잔인한 것은 없을지도 몰랐다. 누구도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이 발가벗겨지는 걸 원하지 않으니.


"예전에도 소년 역할을 하지 않았나? 그랬던 거 같은데?"


장욱진은 팸플릿 사진을 툭툭 손가락으로 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했었지. 다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다들 영화배우니 탤런트니 어쩌구 하면서 떴는데 선미만 주구장창 소년이야. 사뮈엘 베케트가 베케트인 것처럼."


"무슨 말장난이냐?"


"될 사람은 되고 아닌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지."


"선미가 가능성이 없다는 거냐?"


"딱히 그렇다는 건 아니고…."


장욱진의 다그침에 나는 말꼬리를 내렸다, 햇살이 따가웠다.


"그런데 유명한 에피소드 아냐? 베케트가 니가 가라! 했다는 거?"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책에서 책으로만 널 뛰니 맛이 갔냐? 사뮈엘 베케트가 영화배우냐? 니가 가라 말하게?"


"노벨상 준다고 하니까 베케트가 출판사 사장한테 그랬다니까! 니가 가라 스톡홀름!"


"왜?"


김용덕은 내내 팸플릿을 뒤적이다가 나를 보며 물었다. 저만치 떨어진 작은 광장에서 비보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박수 소리와 여고생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은둔형 외톨이는 아니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걸 싫어했나 봐. 더구나 노벨상 시상식장에서 어깨 으쓱거리며 거들먹거리는 짓은 꼴불견이라고 여겼나 봐.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다들 사람 나름이지. 저마다 자기 색깔이 있으니까. 너처럼 맨날 막걸리에 절어 있는 놈이 공부를 계속하리라곤 나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요즘도 꽁초 주우러 다니냐?"


장욱진은 비아냥거렸다. 형편에 눈 돌리지 않고 본질에만 매달리는 짓은 생활을 더없이 힘겹게 만들지만 캘리포니아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욱진의 비아냥거림 속에는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 본질을 내주면서 형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중년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지금이 더없이 안타까운 순간이라는 흐릿한 자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싫든 좋든 다들 어차피 지나가는 존재이지 머무를 수 없었다, 시간은 잔인했다.


"비트겐슈타인이라고 공대 출신 철학자가 있었거든."


"또 무슨 뻘짓 하려고?"


"세상은 언어로 구축되어 있다. 그러니 쓸데없는 의문은 갖지 마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침묵하라."


"뭔 개소리야?"


"캘리포니아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말이야. 만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실체는 없고 다들 조금씩 다르겠지만 환상을 가지고 있잖아? 고도처럼."


"난 그런 거 없다."


김용덕은 길게 하품했다.


"나도 없다. 애인이기라도 했냐? 환상을 갖게. 너만 놓아주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지."


장욱진은 맞장구쳤다. 사실 둘은 언제부터인지 캘리포니아 그녀의 편지도 읽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서둘러 변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래되고 낡은 기억 속에서 캘리포니아 그녀를 되살리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감정 낭비인지도 몰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저 밑바닥에 고여 있는 캘리포니아 그녀에 대한 흐릿한 연정을 장욱진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비보이의 춤사위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여고생들의 어깨에도 햇살은 따갑게 쏟아지고 있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 않은가,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가, 지금 또한 과거가 되지 않겠나…, 나는 팸플릿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김선미를 내려다보았다.     


96


사람이 정말 언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대는 추상적인 나무 한 그루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사는 건조했다. 그들의 동선은 나무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조명은 밝지 않아 흡사 수천 년의 저녁을 한 장면으로 압축해서 펼쳐놓은 듯했다. 세상의 모든 저녁은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은 괴벨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루했다.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에 입술 뜨겁게 달아오른 평론가들의 그럴듯한 달콤함에 빠진 관객들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허공에 올려놓으면 금방 사라지는 대사들을 배우는 열심히, 그러나 무심히 내뱉었다. 동작은 크지 않았다. 지루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대사들은 실제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어는 반드시 필요에 따라 써먹는 건 아니다. 무대와 배우의 대사와 동선이 실제 삶을 압축해서 보여준다고 해도 무대 위의 시간은 관객의 시간과 같이 흘러갔다.


지루했다. 포조와 럭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등장은 꽤나 엽기적이었다. 럭키의 목줄 때문이었다. 관객들은 이내 럭키의 목줄이 강아지의 목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따분해하면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집중했다. 무엇 때문에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지 이유조차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실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들 앞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고도 씨는 오늘도 못 오십니다. 김선미다, 아니 양치기 소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돌싱 김선미이면서 동시에 양치기 소년이다. 무대 위의 그녀를 혹은 소년을 확인했다는 사실만으로 어깨 짓누르던 의무감을 이윽고 내려놓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연극은 지루했고 결국 끝났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재미 1도 없네."


장욱진은 극장을 빠져나와 뒤늦은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관객들을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의미를 찾으려는 골똘한 표정으로 걸음 옮기고 있었다. 햇살은 한풀 기가 꺾여 느슨해졌다.


"조커 같은 애매한 악당이라도 등장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할리퀸이라도!"


"그들이야말로 영화업자를 먹여 살리는 알토란이지.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잖아? 오직 나쁜 사람만 있을 뿐이지."


작은 광장에서 비보이들의 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여고생들의 싱싱한 웃음, 느슨한 햇살 속에도 시간은 숨어 있었다. 김선미는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합류하기로 했다. 우선 허기부터 채워야 했다.


"맞선 봤다."


김용덕은 양심선언 하듯이 의미심장하게 불쑥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블라디미르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껑충한 키며 호리호리한 몸이 블라디미르 역할을 한 배우와 흡사했다.


"자취도 신물 날만 하지. 목포 가서?"


"때려죽이겠다는데 어쩌냐? 간만에 유달산 공기도 맘껏 마셨지."


"심정이 어떠냐?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는. 근데 이쁘냐?"


"안 생겼다고 내가 얘기하겠냐?"


"벌써 콩깍지가 씌었구먼!"


"아무렴!"


"그렇다면 법적으로 심정적으로 캘리포니아 그녀는 열성팬 한 놈을 잃어버리는 거네. 그렇잖냐?"


장욱진은 빈정거렸다.


"가는 세월 누가 막냐?"


"하긴, 쟤네들도 곧 늙어갈 테니…."


장욱진은 비보이들과 여고생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건널목 건너 혜화동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가 결국 신의주 순댓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장욱진은 반주가 필요한 나이라며 소주를 추가했고 김용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은 급격하게 어두워져 갔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지만 순댓국은 금방 왔다. 소주잔을 채워 서로 부딪쳤다.


함경도 말투와 억양이 여전히 남은 아주머니는 부지런했다. 나는 허겁지겁 배를 채우면서도 늘봄식당에서 순댓국을 팔고 있을까, 쓸데없는 추측을 했다. 미국인들이 먹지 않는 내장을 취급할까. 미국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분단을 기껏 순댓국으로 달래는 남쪽 한국인들을 어떻게 여길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쓸데없는 물음표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어쩌면 공연이 끝나고 텅 빈 무대에 고도는 나타났을 거라는 짐작. 관객들이 떠난 자리를 찬찬히 훑어보면서 안간힘으로 기다려준 노력을 위로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 분단의 끝은 그렇게 오랜 기다림에 지쳐 관객들이 떠난 무대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짐작. 순댓국은 뜨거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는 파리 목숨이었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