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진로상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기 Jan 21. 2019

평행우주이론


멕시코의 남부 유카탄 반도에 가면 고도 Merida가 있다. 이 곳 주민들은 매일 밤 9시면 광장에 모여 밴드의 리듬에 맞추어 라틴댄스를 춘다. 근처에는 성당, 시청, 재래시장이 있고, 주택들이 있다. 세계는 여기서 시작하고 여기서 끝이 난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세상을 마치게 되면 나머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처럼 스페인어를 할 줄 알거나 최소한 대충은 알아듣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영어로 물어봐도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라틴계 나라들을 관광하면 우리가 영어를 세계 공용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생각하지 않나 의구심이 들 정도다.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 중남미 모든 나라들이 브라질만 제외하고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디어를 공유해서 보니, 중남미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그 중심에서 나머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다문화 세계관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역사가 오래되었다. 공항은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혼동을 주는 일차적인 공간이다. 갑자기 늘어난 외국사람들, 그 외국어들과 생김새, 행동은 세계 속에서 자기 동네 사람들이 산꼭대기 바위에 붙은 껌딱지 만하게 축소되는 경험을 준다. 




평행우주이론이 물리학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캐나다서 살면서 한국 뉴스를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접하고 개인적은 한국서 사는 사람들의 진로 상담을 받다 보면, 오래된 흑백영화를 틀고 감상하는 기분에 빠진다. 예를 들어 스카이 캐슬에서 나오는 가치관과 문화에서 '아 저런 적도 있었지, 요즘은 저렇게 까지 하는구나'라는 기본 공감대는 과거를 재생해보는 노력의 결과로 얻는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내가 지금 사는 공간은 토론토 중심 채널 CityTV이다. 분명하게 한국서, 그것도 대전에서 , 남편의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어느 마흔 중반 아줌마가 스카이캐슬 드라마를 보면서 반응하는 세계가 존재하고, 한편, 인도인, 백인, 중국인 등 20명이 매일 아침 10시 업무 진행 회의를 하는 토론토 금융가의 세계도 존재한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다른 게임의 규칙과 긴장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에게 시간을 정해서 끼어든다 (interception). 한국사는 사람의 슬픈 상담을 귀담아들을 때, 옆에서 아내가 '이거 수프 마실래요?'라고 물어본다. 눈 짖으로는 엄지척 올리면서 '맛있다'는 사인을 보내지만, 눈과 귀는 태평양 건너서 전달되는 하얀 손수건의 흐느낌을 듣고 있다. 이게 뭐지, 나는 어디에 내 감정의 기준점을 잡아야 하나?




나는 손혜원 의원을 지지한다. 그녀가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고 있다. 박항서의 쾌거를 보면서 한국보다 베트남 축구경기에 매료되고 있다. 손혜원 사건에서 나오는 세계와 박항서의 베트남 세계는 서로 다르다. 대전 아줌마의 세계와 토론토의 내 직장생활세계도 다르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세계가 겹치고 서로 교차된다. 이도 저도 모두 털어버리고 싶을 때는 영하 16도의 눈 쌓인 동네 거리를 걸어서 맥도널드로 향한다. 최소한 그곳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제공된다. 공간? 그것은 세계다.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떤 직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저 고객님 중에 하나다. 기껏 해봐야 1불짜리 커피 한잔으로 두 시간 공간을 점유하는 고객님이다. 




세계가 하나일까?




실제 세계는 하나일지 모르지만 경험론적으로 보면 세계는 여러 개다. 여러 세계는 수없이 교차된다. 같은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나의 내면에 집중할 때, 상대방의 마음에 집중할 때, 집단에 집중할 때 미세한 차이로 세계는 다시 분열한다. 분열하고 부분적으로 겹치고, 다시 선택하고 분리되는 세계들. 그것은 차라리 여러 우주가 겹치면서 병존한다는 평행우주이론에 가깝다. 




밤에 침대에서 눈을 감으면 수면 속에서 꿈을 꾼다. 그 꿈은 영화보다 더 사실적으로 나의 경험을 지배한다. 나는 그 공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면서 지나가는 행인이 된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그 세계는 푸시식 날아가 버린다.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긴장감이 떨어진다. 걱정은 사라지고, 안도감이 온다. 혹은 아쉬울 때도 있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공포 꿈을 꾸었다. 손을 가슴에 올리고 자서 그런 것인지, 여간 불쾌하고 무서웠다. 잠에서 깨는 순간, 대부분 소변이 마려워서 이지만, 나는 깨는 순간 안도하게 되고, 이제 다른 세상에 진입하게 되었다. 일요일의 평온한 가정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괴로운 공간이 있다. 대전의 중년 여인처럼, 껄끄런 부부관계가 있는 세계가 꿈이라면, 깨어나면 다른 공간으로 위치 변동할 수 있다. 마치 배우가 다른 무대에 서면 다른 배역을 하듯이. 악몽은 오랫동안 기억의 한 구석을 움켜잡고 있어서 비슷한 상황이 오면 화가 나고 방어적인 태도를 만든다. 꿈에서 깨어나면 다른 세상에 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피해받던 시절의 응어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같은 물이라도 해골바가지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썩은 물을 먹은 것 같고, 여자 친구네 집에서 대접받은 물은 애틋한 정이 담긴 물로 보인다.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그 상황에서 조금 초월해서 다른 세계의 관점으로 상황을 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유연하게 사고체계를 변경하는 사람은 오랜 수도를 하지 않고서는 드믈다. 간단한 것은 그 공간에서 몸을 피하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들이 중첩돼있다. 세계는 널려있고, 나는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공간이 달라지면 새로운 공간에서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자기 정체성도 바뀐다. 내 몸 그대로 서울의 백화점 매장에 들리면 직원들이 '아버님 무얼 찾으세요'라고 꾸벅거린다. 그대로 토론토의 직장에선 20대 중반 여직원이 '어이 스커트 이리 와 볼래?'라고 부른다. 어떤 세계에 있느냐에 따라 내가 다른 사람이 되고, 주변으로 부터 다른 기대를 받게 되고, 나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된다. 맥주 마실 때란 커피 마실 때랑 기분이 다르다. 그전에 무얼 마실지는 내가 선택한다. 내가 어느 세계에서 살지는 내가 선택한다. 일부러 랜턴을 들고 거미줄 처진 지하실로 가고 싶지 않다. 일주일이 가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서 나이도 먹고, 어느새, 기력이 떨어진 노인이 된다. 그 사이 무수하게 많은 세계들이 복잡한 도심지의 차량들처럼 돌진해오기도 하고 비껴가기도 한다. 나를 이곳에 태워준 택시에 내가 집착하지 않듯이 내가 살아온 과거의 세계들에 아쉬움이나 후회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슬픈 꿈을 꾸었다고 아침부터 징징 우는 아이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세계는 늘 새롭게 다가오고, 현실세계 속에서도 나는 내 멋대로 인식을 달리할 수 있는데, 스스로 진퇴양난에 빠져서 인생을 우울하게 보내는 것은 참으로 납득이 안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캐나다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싶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