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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데자뷰
By 여정 . Jan 08. 2017

밥은 먹었니

우수, 어머니의 사랑

텔레비전 옆의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트로피에는 ‘2015 BEST STOR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엄마는 십 년 넘게 S백화점에서 일하셨다. 그리고 현재는 모두가 인정하는 G브랜드의 중간관리자가 되셨다. 엄마는 내가 자랑거리라 하시지만, 오히려 내게는 엄마가 아주 커다란 자랑거리다. 누군가 엄마에 대해 물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까지 일일이 자랑하곤 한다. 나의 엄마가 아닌 자신의 모습으로 성공한 모습이 존경스럽다. 엄마는 참 멋진 여자고, 참 멋진 사람이다.


하지만 엄마가 오랜 시간 쌓아온 업적만큼이나 만만찮은 고질병도 생겼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 선채로 근무하셔서인지 허리가 자주 아프다고 하셨다. 그동안은 별다른 조치 없이 안마나 찜질로 버텨왔는데, 올봄에는 더 이상 허리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디스크 증상이 있어 정밀검사를 했더니, 뼛조각이 신경을 찌르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진료를 잘한다고 소문난 이 병원, 저 병원 다녀가며 여러 번의 수술을 받으셨다. 허리가 아파 돌아다니기 힘든데도 바로 수술하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한 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매장을 오래 비울 수 없다는 책임감에서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끝까지 강해 보이기만 했다.



나는 그 와중에 출퇴근 시간을 이유로 엄마가 수술받으신 날 곧바로 병원에 가지 못했다. 엄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도, 자격도 없었다. 나에게 병원과 수술은 썩 반갑지 않은 냄새를 지독히 풍겨댔다. 불청객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했던가. 중학교 졸업사진 촬영을 앞두고 머리카락을 자르려 머리를 만져보고 있었다. 그런데 유난히 왼쪽 두개골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뭔지 불안감이 온몸을 뒤덮었고, 부모님과 함께 큰 병원으로 향했다. 병명은 뇌 형성 장애증, 성장기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주 보이지 않는 희귀한 병이었다. 과하게 자라나는 두개골의 절반 가까이를 잘라내고 인공 두개골을 끼워 넣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 내 나이 고작 열여섯이었다. 8년이란 시간이 흘러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덤덤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지금이야 괜찮지만, 그때만 해도 인생이 그렇게나 허무하게 무너지는 줄 알았다. 어째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삿대질하며 원망하기 바빴다. 그게 곧 스스로를 망치는 건 줄도 모르고.


그 수술은 내가 저지른, 그리고 저지를 수 있는 불효 중 최고라 여긴다. 수술 전날 머리카락 한 올도 남지 않은 거울 속 초라한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펑펑 울던 아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붕대를 휘감아놓은 머리에 주삿바늘을 꽂아 피를 빼내며 누워있는 아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나만 생각하기 바빴다. 수도 없이 괴로워했다. 밥에 물 말아 한 숟갈이라도 먹어보라고 권하는 엄마의 손을 밀어내는 나에게 어쩌려고 그러냐며 버럭 화내시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픈 아들에게 힘들고 속상한 티 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시던 뒷모습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픈 건 나인데 주변 사람들이 왜 그리도 힘들어하는지, 왜 그리도 걱정하는지를. 조용히 뒤돌아 눈물을 훔치시던 엄마는 분명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아프셨을 거다.


검진을 받으려 병원에 들린 날이었다. 카운터 앞자리에 앉아 결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으로 어떤 중년의 남성분이 다급한 모습으로 뛰어오셨다. 간호사분께 아내가 수술에 들어간 지 여섯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수술이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다며 안심시켜드린 후에야 다시 수술실 앞으로 돌아가셨다.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에서 느껴졌다. 소중한 사람이 아프구나. 그런데 남편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내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구나. 두 분 모두 얼마나 아플까, 감히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혼자만 아픈 게 아니었다. 아픔조차 나누려는 마음이 있었다.


엄마는 내 곁에 계셨다. 그런데 대체 나는 무얼 망설였던 걸까. 이기적인 자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기 생각만 했다.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도, 수술이란 말의 무거움도, 허술한 핑계일 뿐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까지 걷고, 또 걸었다. 마지막 수술을 받고 입원하신 병원은 사무실 근처였다. 몸이 아파 누워있으면서도, 퇴근한 아들이 일에 지쳐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왔다 갔다 하는 게 걱정이셨는지 오지 말라는 말씀뿐이었다. 그래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기쁘고 반가운 감정까지 숨길 순 없었다. 무뚝뚝한 아들이라, 자기밖에는 모르는 바보 천치 같은 자식이라 병실에 들러 괜찮냐는 한마디 꺼내기조차 어려웠지만, 너그러운 엄마는 어서 집으로 가 쉬라고 손을 내저었다. 퇴원을 하고 며칠 동안 통증이 가시질 않아 재차 입원하시기도 할 만큼 꽤나 고생하셨다. 그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완쾌하신 모습에 안심하고 감사했다.



수술 후 서너 달이 지나 폭염주의보 소식이 연일 쏟아지던 여름이었다. 분명 엄마가 쉬는 날인데,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잠깐 병원에 왔어. 밥은?

아직.

닭죽 사갈게. 조금만 기다려.     


병원에 간 이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엄마는 그보다 내가 밥은 먹었는지가 우선이셨다. 그저 허리 수술을 받은 병원으로 정기검진을 가신 줄 알았다. 나도 수술을 받았던 병원으로 가끔 검진을 가곤 하니까. 복날이었던 바로 전날 삶은 닭이 비리고 질겨 많이 먹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그냥 오시라는 말에도 닭죽을 사다 주셨다. 식탁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누나가 다가와 그랬다.


엄마 수요일에 수술받아.

왜 또? 허리 다 나은 거 아녔어?

허리 말고 가슴 쪽에. 혹 비슷한 게 조금 커져서 제거하자고 했데.         


닭죽 뚜껑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자식들의 걱정이 수술보다 안타깝고 힘드셨던 거다. 저녁 준비하시는 뒷모습이 왜 그리 짠하던지. 부엌으로 나가 여쭤봤다.


내일 수술 몇 시야?

한…10시쯤? 왜?

같이 가야지.

아이고, 뭐하려고. 간단한 수술이야. 엄마 혼자 가도 돼.

그래도.


다음날 아침,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어코 혼자 가셨다. 수술이 끝나갈 때쯤 전화를 걸었다.


수술 잘 됐어?

밥은?

아직. 수술 잘 받았냐니깐.

응.

왜 혼자 가셨어? 같이 가자니까 참.

뭐하러, 이런 것도 수술이라고.

언제 집에 와?

다섯 시 넘어서나.

알았어.     


이른 아침 곤히 자고 있는 아들을 깨우기가 미안하셨던 건지, 정말 혼자 가도 괜찮으셨던 건지. 수술은 잘 됐냐는 걱정스러운 질문에도 그저 밥은 먹었냐는 걱정이 우선인 우리 엄마. 내가 어렸을 적 일이 바빠 제대로 된 반찬을 해먹이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다고 고백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다 큰 아들이 먼저 아프신 곳은 없는지, 밥은 드시고 일하시는지 자주 여쭤보지 못해 죄송했다.


어느새 쉰 살이 되신, 그래도 내 눈에는 아직 젊고 예쁘기만 한 우리 엄마. 이렇게 글로나마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아프지 말라고 전하는 아들을 용서하시길 바라본다.


엄마는 언제나 강한 초인이 아니다. 엄마도 아플 땐 아프고, 슬플 땐 슬픈 사람이다. 단지 자식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에게 엄마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위대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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