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
이영진
벌써 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도.
처음 뵈었을 때가 생각난다. 1992년, 서울대에서 오페라 <파우스트〉 를 공연하는데, 조연출을 구하지 못해 난리가 났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인영 선생님 성격 탓에 몇 명의 조연출이 도망갔다. 하루는 내 연출 선생님이신 김홍승 교수님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전화를 하셨다. 얼씨구나 하고 맛있는 음식 얻어먹고 커피 한잔 마시며 낄낄거리는데, 심심한데 오페라 연습이나 구경 가자고 하셨다. 백수가 뭔 특별한 일정이 있겠는가. 선생님 차로 서울대로 향했다. 오페라 연습실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이인영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데도 오금이 저렸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오신 분이라 연출은 또 엄청 치밀하셨다. "이 음악에서 고개를 들고, 이 음악에는 몇 걸음 걷고, 이 음악에 돌아봐라. 이 음악에 등장해서 이 간주 때 움직이고, 이 음악에서는 지휘자를 봐라." 하고 섬세하게 주문하셨다. 연습 끝나고 우리 쪽으로 오시더니, 내 이름을 물으시더니,'너 내일부터 나와라." 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일방적으로 오페라 조연출이 되었다. 나를 데려온 김홍승 선생님은 학교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 나를 내려주며, "넌 이제 죽었다. 인마. 고생해라." 킬킬킬 웃으시더니 차를 타고 잽싸게 도망가셨다. 이인영 교수님이 어디서 조연출 하나 데려오라는 엄명을 받고 나를 데려다 심어 놓으신 것이다. 김홍승 선생님도 이인영 선생님 조연출 출신이니 나에게는 스승의 스승, 즉 할아버지 연출이 되신 거였다.
그 뒷날부터 업무가 시작됐다. 나에게 오페라에 쓸 소품 이것저것 만들어 오라고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파우스트 박사 책상 위에 놓일 해골을 만들어 오라지를 않나, 칼을 만들어 와라, 파우스트 박사의 큰 책상을 만들어 와라, 힘든 나날이었다. 처음 몇 번은 성악 전공 학생들이 도와주다 며칠 지나니 수업 들어가야 한다며 다 도망갔다. 도저히 안돼서 소품 제작소에 주문 제작을 맡기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리니, "야, 인마. 학교 오페라 만드는 데 뭔 돈이 있겠노? 그리고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 봐야 성취감도 있고 보람이 있지. 안 돼" 단호히 거절하셨다.
'노랭이 영감, 학생들이 만들긴 뭘 만들어요? 내가 다 만들고 있구만, 씨발'
좌우지간 '안 되면 되게 하라'가 선생님 삶의 방침이었다. 하루는 깃발을 여러 개 만들어 오라고 주문하셨다. '병사들의 합창'이라는 장면에 들고 나와야 한다고. 나도 다 때려치우고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나를 데리고 온 김홍승 선생님 체면 때문에 그만두지도 못했다. 오래 고민하다가 이판사판 공사판이라고, 무작정 미술대학을 찾아갔다. 학생들에게 사정 얘기를 했지만, 잡상인 취급만 당했다. 만나는 학생마다 통사정하니 처음에는 거부하던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오랜 회의를 거친 후에 도와주겠다고 허락이 떨어졌다. 그날부터 의기투합해서 같이 물건도 사러 가고, 하나씩 만들다 보니 재미도 있었다. 그들도 신이 나서 점점 적극적으로 모든 소품을 만들어 주었다. 하다못해 옷에 걸치는 망토까지 재봉질해서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내가 미술하는 친구들을 좋아하는 것은 그때의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고 작업 지시와 돈을 받은 뒤 사라졌다가 저녁 연습 시간에 소품을 들고 나타나니, 교수님은 '이놈이 어디 숨겨놓은 우렁각시라도 있나? 하셨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같이 점심 먹자며 교수 식당에서 내게 물으셨다. 그 소품들 어디서 가져오는 거냐고.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더니, "어 이놈, 이거 어디 던져놔도 살아서 기어 나오겠네." 하시며 껄껄껄 웃으셨다.
가장 만들기 어려웠던 소품은 큰 참나무 술통(오크통)이었다. 만들다 지쳐 나중에는 미술과 학생들과 근처 레스토랑에서 사정하고 빌려왔다. 이 모든 과정을 선생님은 지켜보신 것이다. 한 달 넘게 지켜보시던 선생님이 어느 날 나를 교수실로 부르셨다. 이것저것 물어보시다, 내 고 향이 제주도라는 걸 알고는 "어? 이거 촌놈 아녀" 하셨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내게 '이군' 또는 '촌놈' 이라고 부르셨다. 선생님이 부산 출신이라 촌놈이라고 부르는 게 친근감의 표시였다. 연습실에서도 그렇게 부르셔서 창피했다. '아, 씨벌. 여자애들 앞에서 이름 놔두고, 내가 이 학교 급사여 뭐여' 속으로 투덜대기도 했다. 내가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호칭을 조금 격상시켜주셨다.
"어이, 컨츄리"
어느 날, 선생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 거냐고 물으셨고, 일본 유학을 권하셨다. 일본어도 한마디 못하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를,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셨다. 또 친한 일본인 친구들에게 알거지인 나를 잘 챙겨달라고 특별 부탁까지 하셨다. 선생님은 일본에 오시면 늘 내게 연락하셨고, 언제나 '오차노미야'에 있는 YMCA 건물에 묵으셨다. 길 건너 3대가 운영하는 유명한 돈가스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옛날 해방 후에 일본 유 학 와서 저 식당에서 밥 먹고, 여기 이 자리에 앉아 향수에 젖어 글을 썼노라고 회상하며 옛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교수님의 부고장을 받아들고, 출장 중 부랴부랴 의상도 못 갖추고 조문 드리러 갔더니, 조의금 사절이었다. 돈 안 되는 예술하는 제자들 돈 받지 않으시겠다는 배려였다. 늘 긍정적이고 유머 넘치시던 분. 학교, 또 무대에서는 호랑이. 황제.
마지막으로 뵌 게 돌아가시기 삼 개월 전이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맛있는 회와 매운탕을 먹으며 재미난 옛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오래전 무대 뒷이야기를 들으며 낄낄거렸다. 성악인들의 뒷이야기, 그들만의 고민과 삶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어 하던 분. 조금만 기다리시 면 내가 정년퇴직하니 그때는 자주 찾아뵙고, 이 재미난 이야기들 글로 남기자고 말씀드리니 무척 기뻐하셨다. 그게 마지막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또, 다른 핑계는 선생님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일본에 오페라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그 공부는 안하고 돈이 되는 뮤지컬 쪽만 공부했다. 귀국할 때도 유학한 지 7년밖에 안 된 놈이 벌써 뭘 배웠다고 귀국하느냐 야단맞을까 봐 몰래 귀국했다. 내 가슴속에는 교수님께 죄스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딸만 셋인 이 교수님. 큰 따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내 소개를 했더니, 생전 아버님이 나를 많이 자랑스러워하셨다는 과분한 답례를 받았다. 정작 발인 날엔 공연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아니 참석하면 죄책감으로 너무 힘들 것 같아 영정 사진만 오래도록 보다가 왔다.
2019년은 나에게 너무도 가혹한 해였다. 4월에 아버님을 보내 드리고, 3월엔 큰 스승님을 보내 드려야 했다. 성악 수업 받으러 온 학생 양말이 구멍 난 걸 보고, 안방에서 새 양말 꺼내 주시던 분. 제자 등록금이 모자라자 사모님 교회 십일조 봉투에서 돈은 빼내고, '하느님 죄송합니다' 하고 쓴 글을 넣어 두신 분. 재미난 일화가 끝도 없이 유쾌하고 긍정적인 분이셨다.
조만간 선생님 기일이 다가온다. 용인 어디에 모셨다는 말만 들었다. 가 뵙지는 못하고, 늘 선생님을 위해 기도 드린다. 큰사랑을 받았고, 그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글로 남긴다.
교수님. 그곳에선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했습니다. 죽을 때 까지 제게 주신 큰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영진 : 2020년 수필춘추, 등단,
고양문화재단 전문위원. 일본 극단 <사계> 근무.
2022 종로문협 신인상, 다솔문학상 수상,
산문집: 내가 사랑한 소소한 일상들
*2025년 수필춘추 가을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