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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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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Jan 03. 2019

달콤한 피난처, 안락한 세상

카지노에서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하다

달콤한 피난처, 안락한 세상




- 이탈리아의 코모에 위치한 카지노에 가다

- 카지노에서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하다

- 내게도 어쩌면 피난처가 필요한 날이 오지 않을까...






밀라노에서의 햇살 좋은 어느 겨울 날 ©leewoo, 2017




밀라노에서 친구 집에 얹혀 지내며 글을 쓰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지 말고 저녁에 나랑 같이 스위스에 다녀올래?” 그는 매일 책만 읽고 글만 쓰는 내가 지쳐 보였는지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물론 나만을 위한 여정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부업으로 어느 부인의 운전기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 스위스행에 나를 데려가고 싶어 했다. “나야 좋지만, 너 일하는데 따라가도 괜찮겠어?” 내가 물었다. “아마 부탁하면 들어주실 거야. 기다려봐.” 친구는 전화를 걸더니 웃으며 얼른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만났다. 운전석에서 내린 그녀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가벼운 볼 키스를 해주었다. 족히 50줄에 접어든 것 같은 그녀는 나이 때문에 풍채가 있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다. 문득 그녀가 젊은 시절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어딘가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짙은 회색의 아우디 A8과 윤기 나는 모피 코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아한 미소, 기분 좋게 하는 배려, 어느 영화 속에서 보았던 것 같은 귀부인의 자태가 느껴졌다.



그녀는 상석에 올라탔고, 나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친구는 운전대를 잡았다. 아우디는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밀라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스위스와의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코모였다. 그녀는 조용한 차 안에서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 왜 밀라노에 있는지, 친구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대화는 계속 이어 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행을 허락해준 탓에 고마움을 대신해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려던 나도 이내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우아한 미소는 꾸며낸 것이었을까. 왜 저렇게 침울한 얼굴일까. 호기심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느새 침묵 속에서 도착한 곳은 호텔 카지노였다. 친구는 익숙한 듯 공용주차장을 지나치고 VIP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는 온갖 슈퍼카와 비싼 차들이 즐비했다. 그녀를 따라 호텔 직원의 환대를 받으며 레드 카펫을 밟고 카지노로 들어섰다. VIP 주차장은 역시 VIP만을 위한 공간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블랙잭 테이블이 즐비했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가 부자들만 게임하는 곳이야.” 친구가 넌지시 말했다.



“기다리면서 지루할 테니 맛있는 것 좀 먹고 재미있게 보내렴.” 그녀는 우리에게 티켓 두 장을 건네곤 게임을 하러 갔다. 그건 장당 120유로짜리 호텔 레스토랑 식사권이었다. “그동안 이런 적 없었는데, 네가 따라와서 그런 가보다.” 친구는 하이파이브를 건네며 말했다. 친구는 덧붙였다. 그녀의 게임은 아침해가 떠야 끝나니 우리는 그때까지 게임도 즐기고 레스토랑에서 기분도 내며 시간을 보내자고. 하지만 우리는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놀 수 없었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곳은 슬롯머신이 즐비한 카지노 1층이었다.




우연히 길 위에서 만나 한 달을 함께 여행하고, 두 달을 함께 지냈던 나의 친구 빅토르. ©leewoo, 2017




친구 옆에 앉아 게임 방법을 지켜보았다. 사실 뭐 별거 없었다. 슬롯머신은 그저 확률 내지는 운이 중요한 게임이었지, 법칙도 기술도 없었다. 한참 동안 친구가 게임하는 걸 지켜보았다. 신기하게도 배팅 금액은 점점 늘어만 갔다. “좋아, 난 오늘 이걸로 맥북 사야겠어.” 그가 손을 비비며 야심 찬 눈으로 말했다. 사실 나는 게임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말로만 들었던 카지노가 뭔지 직접 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돈을 따는 친구를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나도 이내 자리를 잡고 머신에 돈을 배팅했다.



정말 간단한 게임이었는데도 흡입력이 장난 아니었다. 화면에는 가로세로 다섯의 칸이 있었고, 세로줄에는 여러 문양들이 동일한 간격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왼쪽 줄부터 각 칸에 맞추어 화면이 멈추었다. 빙고를 하듯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같은 문양이 있으면 점수를 얻었다. 돈이 걸리면 이런 단조로운 게임도 박진감이 넘치는 것이다. 화면이 멈출 때마다 가슴을 조마조마했고, 나지막이 탄식과 환호를 내질렀다. 두 시간 정도 게임을 했을까. 친구는 100유로를 잃었다. 나는 50유로 정도를 땄다.



친구는 하루 일당보다 많이 잃었다며, 벌게진 눈으로 게임을 그만두었다. 이 기세로 게임을 더 해야 하나 고민했던 나는, 이것마저 잃을까 두려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코모 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리며 담배를 피웠고,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을 마셨다. 분위기에 취했던 우리는 3층 VIP 게임실로 갔다. 먼발치에서 게임을 구경했다. 친구는 나지막이 블랙잭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보단 관심이 가는 건 아주머니 었다. 게임에 열중하는 그녀의 눈빛은 생기가 넘쳤고, 명랑하기까지 했다.




코모 호수의 야경 ©leewoo, 2017
첫 카지노 방문을 기념하며, 친구에게 부탁한 사진. ©leewoo, 2017




하지만 피로가 몰려와 계속 구경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한편에 마련된 미니 바로 향했다. 돈을 딴 기념으로 친구에게 위스키를 한 잔을 샀다. 술을 들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한참 동안이나 친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써 새벽이었다. 운전을 했던 친구는 피곤했는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챙겨 왔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으며 밤을 새우려고 했다. 하지만 취기와 피로, 그리고 소음 때문인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고갤 돌리니 게임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어떻게 젊은 우리보다 열정적으로 게임할 수 있는 것일까.



친구가 나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그녀가 게임을 다 끝냈다고 밀라노로 돌아가자고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7시였다. 가볍게 커피 한 잔을 하고 차에 올라타 밀라노로 향했다. 아침 햇살이 충만하게 비춰오고 있었다. “오늘은 어떠셨나요?” 친구가 백미러를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영 좋지 않았어.”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저도 오늘은 별로였네요. 이 친구만 땄어요.” 나는 50유로나 땄다며 유쾌한 목소리로 운이 좋았다고 했다. “운이 좋은 날도 흔치 않은데 더 배팅하지 그랬어. 아니, 같이 블랙잭을 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블랙잭은 못 하겠던데요. 복잡하고 배울게 많더라고요.” 내가 말했다. “축구 좋아하지? 한 번 익히면 축구 경기 보는 거랑 다름없어.” 그녀가 답했다. “그래도 어려워 보이던걸요.” “어렵지 않아. 어려운 건 오히려 우리의 삶이지.” “삶이요?” 내가 묻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블랙잭은 예기치 못한 변수가 없거든. 전략만 잘 짜면 되지. 하지만 삶은 달라. 불가항력적인 변수가 계속해서 우리를 엄습하거든. 삶보다 쉽고 완전한 게 바로 블랙잭이야.” 그녀는 말을 마치곤 피로하지만 카페인 때문에 말똥 한 눈으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둠 속에서 코모 호수를 걸을 때였다. 그는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름다웠던 그녀는 연상의 부호와 일찍이 결혼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이제 남편은 그녀를 내 벼려둔 채 다른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나는 그녀가 유일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존재인 거지.” 그는 조금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가 해주는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도 그녀가 이해되는, 아니 얼추 짐작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침울한 미소, 그리고 매달 정기적으로 오는 카지노 행이 말이다.



카지노는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작은 세계임이 분명했다. 게임을 하는 순간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직 게임의 룰만, 게임의 전략만 생각하면 된다. 내가 슬롯머신에 정신을 팔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승리라는 보상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게임은 끝이 난다. 삶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더 큰 게임장으로 말이다. 삶은 룰도, 전략도 수만 가지이다. 상대도 수만 명이다. 변수 역시 수만 가지이다. 우리는 도대체 삶에서 어떤 게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이드 미러로 조그맣게 비치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있어 카지노처럼, 인간이 과연 삶의 피난처 혹은 위안의 세계 없이 살 수 있을까. 이 복잡 다단한 삶 속에서 말이다. 어쩌면 일 년째 먼 이방에서 세상을 방황하고 있는 나도, 사실은 삶을 도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방황이 나의 본연의 삶이었던가. 그녀도, 친구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과연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침의 태양은 점점 높이 솟으며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우디는 코모를 떠나 밀라노로 나아가고 있었다. 카지노는 점점 멀어지는데, 여전히 나는 카지노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도 삶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찾아 여행을 떠났던 것은 아닐까. ©leewoo,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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