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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Sep 06. 2019

라떼가 맛있어봤자 거기서 거기지

크리스마스에 강림하는건 산타가 아닌 고객이었다

 

‘인생은 어린시절에 가졌던 꿈들이 하나씩 무너져가는 것을 초연하게 지켜보는 일이다’ 라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하나씩 이뤄가며 훌륭한 탑을 쌓지 못한 ‘루저’의 인생관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어디에선가 비슷한 의미의 ‘명언’을 본 것 같기도 한걸로 보아 이런 느낌을 나만 갖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산타할아바지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처음 알게 됐던 때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그때 받은 큰 충격이라거나 거짓임을 알게 됐던 정황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매년 여름이 지날 때부터 그 해의 크리스마스에는 뭘 하며 보내야 할지 심대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크리스마스에 강림하는 건 산타가 아니라, 수많은 고객이었다.    

  

내가 카페알바를 시작한건 10월. 이론상 아직 가을이지만 내가 일했던 카페는 10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프로모션을 시작했었고, 매장도 크리스마스분위기가 나게 꾸며졌다. 고객으로만 지냈던 오랜 세월동안 일찍부터 캐롤이 나오는 것을 즐기러 일부러 그 브랜드의 매장에 방문한 적이 많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캐롤을 들으며 샷을 내리는 낭만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현실은 역시 이상과는 다른 게 제맛이다. 일정량 이상의 커피를 마시면 사은품을 주는 ‘크리스마스 프로모션’으로 인해 다른 때보다 손님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게 ‘현실’이었다. 이제와서 산타가 만나기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카페 알바를 하면 무슨 일을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매장마다 천차만별’ 이라고 한다. 나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것과 카페 알바를 착각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제와 들만큼, 커피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을 것을 기대했었고, 카페 알바의 일은 사실 생각보다 커피와 큰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됐었다. 커피에 대해 비교적 많이 배울 수 있는 매장들도 있다고 하지만 사실 돈을 벌면서 양질의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그곳이 손님이 많고 바쁜 매장이라면, 자연히 ‘배움’ 자체의 기회는 더 줄게 된다.


나는 바쁜 매장에, 특별히 더 바쁜 크리스마스 시즌에 투입되었다. 자연히 선임들로부터 일을 배울 기회가 적었다. 알바를 하면서 일을 체계적으로 배울 것까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그곳은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나는 초반부터 늘 바쁨에 허덕였다. 다른 곳에 비해 복잡하다고 알려진 계산대업무를 익히기도 전에, 첫출근 후 앞치마를 받자마자 바로 계산업무에 투입됐던 첫날밤의 아득한 상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한 남자고객의 음료를 무료 세 번이나 잘못 결제했다. 첫 잔은, 음료 사이즈를 잘못 찍어서 계산했다. 두 번째는 기억도 나지 않는 무언가를 실수했고, 마지막은 손님이 가지고 온 텀블러 할인금액을 적용하지 않는 실수를 했다. 식은땀이 났다. 그 과정에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못했다. 모든 계산대가 열려있었고, 다들 분주했다. 결국 세 번이나 잘못결제를 한 후에야 다른 파트너가 와서 제대로 계산을 마쳤고,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주억거렸다. 그 손님은 “지금 다행히 안바쁘니 망정이지, 장난하는것도 아니고”하며 화를 냈는데, 그 손님의 분노는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이렇듯 당면한 계산업무를 배울 시간조차 없이 바쁘다보니 나는 그나마 가장 먼저 강제로 익히게 된 계산대 업무에만 투입되기 일쑤였고 자연히 ‘바 입성’ 이 늦은 편이었다. 카페 업무의 특성상 교대근무를 하기 때문에 시간대마다 함께 근무하는 인원이 달라지고, 그때마다 “바 가능해요?”라고 묻는 파트너들에게 나는 거의 한달동안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 만 만들어봤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샷에 물을 섞는 순서만 익히면 되어서 뭘 ‘만든다’고 하기도 뭣했던 아메리카노와 달리, 카페라떼는 우유스팀이라는 나름의 ‘중대한’ 절차가 있었기에 제법 바리스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처음의 나는 커피만들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서, 심지어 어떤 거품이 좋은 거품인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십수년간 매일같이 커피를 마셔왔다고 하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알고보니 라떼의 거품은 최대한 입자가 작게 쫀쫀하게 만들어지는게 이상적인 거였다. 우유 스팀내는 법을 배워보니 의외로 결과가 괜찮았다. 고객으로 마셨던 라떼 만큼이나 쫀쫀하고, 잔거품이 거의 일지않은, 그럴싸한 폼이 만들어졌다. 내게 스팀내는 법을 가르쳐주던 점장의 반응도 후했다. 일을 시작한 후로 “잘한다”는 말을 좀처럼 듣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의외로 스팀을 잘 낸다는 평을 받아 기분이 들떴다. 점장은 그 라떼를 백룸에 있는 파트너들에게 맛보여주고 맛평가를 받아오라고 했다. 마침 백룸에는 처음부터 늘 친절했던 대학생 파트너가 앉아있었다. 라떼를 받아들고, “맛평가를 해주시라”는 내 말에 빵터지며 이렇게 말했다.      


“라떼가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어요?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랬다. 사실 라떼는 맛이 없기가 힘들다. 물론 이런 의견에 반대를 할 전문가들도 많겠지만.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같은 우유를 넣고, 같은 스팀기로 스팀을 내기 때문에 스팀을 내는 기술에 따라 거품의 차이가 나기는 해도, 라떼의 맛 자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특별히 못할 수도 없지만 특별히 잘하기 역시 힘들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나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 범위가 적다는 뜻이다. 누가해도 특별할 수가 없는 ‘정도’라는 게 있다. 커피도 그렇고, 인생을 놓고 봐도 그렇다.      


주부로서 바리스타라는 파트타임직업에 지원했을 때 생각했던 나름의 이유들이 떠올랐다. 가장 큰 이유는 ‘파트타임맘’이라는 자리가, ‘워킹맘’과 ‘전업맘’의 사이 어디쯤 위치해 있다는 생각이었다. ‘풀타임’ 워킹맘은 아니기에 그 외의 시간은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컸다. 나름 신중했었다. 일전에 한번 워킹맘으로 살다 병만 얻고 포기했던 경험이 있기에 더 그랬다.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카페알바 후기들을 읽고 또 읽어보았다. 그 후기들에는 공통적으로 ‘시간관리가 어렵다’는 내용이 많았다. 다섯시간만 근무하지만 몸도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풀타임만큼이나 시간관리가 어렵고, 비는 시간에는 잠만 잤다는 후기들도 많았다.


이런 글들을 보면서도 나는 근자감으로 가득했다. 난 잠만 자느라 휴식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심지어 그 어려움을 맞닥뜨렸다는 것에 대한 쾌감까지 있었다. 살림과 파트타임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유튜브 같은 걸로 생중계 해보면 어떨까라는 망상까지 했던 것 같다. 심지어 출퇴근길에 보겠다며 스페인어 인강을 결제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 인강은 절반 가까이를 그대로 날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헛된 꿈으로 돌아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날부터 나는 완벽한 살림은커녕 밥먹은 설거지도 못해서 허둥대며 가족들에게 도움요청을 해댔다. 공부 살림 일을 악착같이 해내기는커녕, 모든걸 놓다시피되었다.      


돌이켜보니 나의 오만이 내 발등을 찍는 이름 경험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되면 여자의 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들이 수두룩하게 생긴다는 말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도 한귀로 흘렸다. 아니, 비웃었다. 치기어린 젊은 날이었다. 게으른 이들의 말일 거라고, 다 하기 나름일거라 생각했고, 나만큼은 꼭 슈퍼맘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랬던 나는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엄마라는 한계 안에서만 머무르며 긴 시간을 보내게 됐다.      


서비스직으로 일하는 것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직이 누구나 접근하기 쉽고, 적성에 맞는 이들도 있지만 처음 하는 사람의 경우는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왠지 나는 진상을 안만날 것 같았고, 왠지 나는 훈훈한 미담만 가지고 퇴사하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계점이 있다. 누구도 평균값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 누구도 산타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나만 특별히 그런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10살 즈음에 졸업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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