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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Oct 25. 2019

어디가서 진상부린 피해는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

직원할인으로 허세한번 부리려다가


나는 ‘카페 알바’이기 전에 전업주부였다.


몇번 여러 방법을 시도한 끝에 일을 하면서 동시에 아이를 제대로 기른다는 게 나에겐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애가 자란 후의 내 미래에 대한 고민 또한 심한 편이라 가끔은 불면증에 시달릴만큼 힘든데,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카페 근무를 한 것도 미래의 선택지를 넓히기 위한 도전의 일환이었다.      


오랫동안 주부이기만 했던 엄마가 일을 한다는 건 딸에게 신기하다는 마음을 들게 했던 것 같다. 딸이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도 회사 다닌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는 걸 듣고는 마음이 왠지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런 내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7개월동안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아이를 데리고 내가 일하는 카페의 다른 체인점에 가서 직원할인을 받을 때였다.      


그날도 오픈 근무로 새벽5시에 일어나 새벽별을 보며 출근하고, 2시에 퇴근해 아이를 픽업 후 보통 전업주부의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몹시 지쳤던 날이었다. 하지만 딸이 ‘엄마회사’에서 파는 초콜릿음료를 마시고 싶다고 말해오는 걸 거절할 수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매장으로 가 아이스초콜릿 음료를 시켰다. 너무 지쳤던 탓에 음료를 받아들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아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엄마. 음료 맛이 이상해.”

    

그제야 음료를 자세히 보니, 초콜릿음료의 색깔이 평소와 달랐다. 초코색을 거의 띄고 있지 않고 밍밍한 회색 빛이 돌았다. 오늘도 같은 레시피의 그 음료를 수십잔 만들고 돌아온 나로선, 그 음료가 잘못 만들어졌다는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음료를 들고 바에 가서 ‘맛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조심스러웠다. 나 역시 수많은 음료 컴플레인을 받아왔는데, 사실 대부분이 별 이상이 없는 음료에 대한 컴플레인이었기 때문에 진상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내 말을 들은 직원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음료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음료를 이미 드셨는데요?”     


음료는 3분의 1정도 줄어들어있었다. 나였어도 진상으로 판단했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애가 마셨는데, 농도가 너무 연한 것 같아요.”     


당신이 ‘역지사지’의 태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카페 알바를 해보라. 이렇게 정말 완벽한 역지사지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알바의 태도가 이해가 안되는 게 아니었다. 나도 일하면서 음료를 꽤 많이 마셔놓고 리필을 위해 음료품질을 컴플레인하는 진상고객을 너무 많이 만나봤고, 그 알바가 내 얼굴을 보고 이 사람만큼은 진상이 아니겠구나라고 판단할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고, 논쟁도 귀찮았고, 기분이 묘했다. 그 파트너는 끝까지 음료를 절대 다시 만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눈빛에는 이미 나를 진상 애엄마로 보는 기운이 만연해있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그럼 초코를 좀 더 부어드리겠다”고 말한 후 바 뒤편에 있던 초코믹스를 꺼냈는데, 내가 알기로 이미 만들어진 음료에 뭔가를 추가하는 것은 위생상 금지되어 있는 거였다. 아마 자신이 보기에도 음료의 색깔이 이상하고, 하지만 결코 ‘진상고객’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기에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낸 타협안이 그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받아든 음료는 이미 새로 섞은 초코믹스와 기존의 회색빛 음료의 층이 분류되어, 원래보다 더 참혹한 맛으로 변해있었다. 결국 그대로 남긴 채 씁쓸하게 문을 나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음료 맛에 대한 컴플레인을 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심지어 똑같은 통에 들어있는 오늘의 커피를 따라만 준 것인데도 옆친구의 것과 다르게 자신의 것은 비린내가 난다고 한 손님도 있었다. 이후 손님은 자기가 점심메뉴로 생선을 먹고와서 그런 것 같다며 떠나긴 했어도. 이런 수긍조차 안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기에 그 알바의 그런 반응이 이해가 안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나 스스로에게 반성도 하게 했다. 그 무렵의 나 역시도 바에 서서 부르는 목소리에 민감했다. 음료컴플레인을 받으면 나의 경우는 대부분 사과 후 다시 만들어제공하는 편이었지만, 속으로는 ‘맛이 이상한건 아니지만 더 말이 나오는게 싫어서 해준다’는 생각을 갖고서 억지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이 사건에서 내가 느낀 건, 어디 가서 진상부린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진상에게 당했던 트라우마가 방어적인 직원을 만들고, 그 피해는 결국 소비자게에 돌아가는 것이다. 이건 결코 ‘역갑질’의 마인드로 하는 말이 아니다. 한 곳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던 내가 다른 곳에서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불이익을 당했듯이, 정말로,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의 입장은 꼭 한편에만 서 있게끔 되어있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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