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지 못하는 인간들

김동인이 그린 두 가지 지옥

by 가오나시

김동인 ≪감자≫(1925.1), 《조선문단》

김동인 ≪광염 소나타≫(1930.1), 《중외일보》

김동인 ≪광화사≫(1935.12), 《야담》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1932.1), 《동광》


김동인, 근대의 성취와 불편한 출발점

1900년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동인은 1919년 한국 최초의 순수 문예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며 한국 근대문학사의 서막을 열었다. 그는 ≪약한 자의 슬픔≫ (1919), ≪배따라기≫ (1921)를 발표하며 근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정착시켰고, 이후 ≪감자≫ (1925), ≪광염 소나타≫ (1929), ≪발가락이 닮았다≫ (1932)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그 양식을 완성해 나갔다. 예술지상주의와 개인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라는 평가는 이러한 성취 위에 놓여 있다.


그가 활동한 1920~30년대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체계화되면서 도시 빈민이 넘쳐나고 농촌의 생존이 위협받던 모순적인 시기였다. 계급 이동의 가능성은 희미해졌으며, 근대적 가치관은 전통 질서와 충돌하며 사회 전반에 균열을 남겼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많은 작가들이 현실을 견디게 할 의미나 출구를 모색했을 법하지만, 김동인의 작품은 그 방향을 택하지 않는다.

왜 그의 세계에는 끝내 구원받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가.

왜 그의 서사는 언제나 절망의 정점에서 끝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글은 김동인의 단편들을 윤리나 도덕의 잣대가 아니라 장르문학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지옥 1] 시대가 만든 타락

≪감자≫와 ≪발가락이 닮았다≫의 인물들은 이미 타락 외의 선택지가 제거된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김동인의 세계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개입하기도 전에 삶의 조건이 서사를 압도한다. 인물들은 옳고 그름을 고민하기보다, 그 상황을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 앞에 놓인다.


≪감자≫에서 복녀는 늙고 가난한 남편에게 시집와 빈민굴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 때문에 생계가 막막했던 그녀는 송충이를 잡고 감자를 훔치며 연명한다. 이마저도 부족했던 복녀는 노동감독관과 중국인 왕서방에게 몸을 팔며 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왕서방이 새로 어린 여자를 첩으로 들이자 복녀는 질투에 사로잡혀 칼을 들고, 결국 다툼 끝에 오히려 찔려 죽는다. 사건 이후 복녀의 남편과 왕서방은 뇌물을 주고 일을 덮는다.


이 서사에는 반성도, 각성도,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복녀는 가난에서 출발해 생존을 거쳐 범죄로 이르는 단선적 궤도를 따라 추락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복녀가 ‘나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이다. 김동인은 그녀를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그는 판단 대신 관찰을 택한다. 이 작품은 사회 고발문이 아니라, “이 조건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기는 냉정한 장르적 실험에 가깝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노총각 M은 과거의 방탕한 생활로 성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생식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갑작스럽게 결혼하고, 아내의 임신 소식 앞에서 기쁨보다 불안에 휩싸인다. 의사인 화자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하지만, 결정적인 검사는 끝내 받지 않는다.


아이의 탄생 이후, M은 아이의 발가락이 자신과 닮았다며 집요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발가락은 혈연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라, 불안을 견디기 위해 붙드는 상징적 징표다. 화자는 의사로서의 진실 대신 인간적 동정에 따라 거짓말을 선택하고, 그 거짓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침묵 속에서 혈연이라는 믿음을 유지시킨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혈연의 붕괴를 다룬 작품이 아니라, 혈연이라는 허구가 연민과 자기 보존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연장되는가를 보여주는 냉정한 장르적 우화다.


이 세계에서 비극은 폭로가 아니라 회피에서 발생한다. 진실은 끝내 드러나지 않고, 불안 위에 세워진 믿음은 그대로 존속한다. 도덕적 판단이나 윤리적 결단은 개입하지 못하며, 인간은 견딜 수 없는 진실보다 견딜 수 있는 거짓말을 선택한다. ≪감자≫에서 복녀는 죽임을 당하고, ≪발가락이 닮았다≫의 남편은 의심을 끝내 해소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세계는 변하지 않고, 인간은 나아지지 않는다. 김동인은 ‘구원 없는 지속’의 감각을 그려냈다.


[지옥 2] 예술이 만든 광기

≪광염 소나타≫와 ≪광화사≫는 김동인의 세계가 도달한 또 하나의 지옥을 보여준다. 여기서 질문은 더욱 노골적이다.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김동인의 대답은 분명하다. 예술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과 파괴를 가장 정교한 언어로 정당화할 뿐이다.


≪광염 소나타≫는 음악 비평가 K가 사회 교화자 모 씨에게 작곡가 백성수의 삶을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된다. 백성수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으나, 어머니가 위독해지면서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를 살리고자 담배 가게의 돈을 훔쳤지만 붙잡혀 감옥에 가고, 결국 어머니도 구하지 못한다. 출소 후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그는 가게에 불을 지른다. 백성수는 그 불길 속에서 광적인 영감에 사로잡혀 교회 피아노 앞에 앉아 문제의 작품 ‘광염 소나타’를 작곡한다. 이 사건 이후, 그에게 예술은 표현의 결과가 아니라 범죄의 동기가 된다. 백성수는 작곡의 영감을 얻기 위해 방화와 살인을 반복한다. 마침내 그는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벗어난 행위에까지 이른다. 그 결과 그는 걸작을 연이어 남기지만, 끝내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작품 속에서 K는 그의 천재성을 옹호하고, 모 씨는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며 맞선다. 그러나 이 대립은 화해되지 않는다. 예술과 윤리는 공존하지 못한 채 끝까지 분리된 상태로 남는다.


≪광화사≫는 더 직접적으로 예술의 폭력을 드러낸다. 화가 솔거는 추악한 외모로 인해 사회와 단절된 인물이다. 그는 인왕산에 은둔해 이상적인 미인도를 완성하려 하고, 우연히 시냇가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만난다. 외모 때문에 늘 거절당해 왔지만, 이 처녀는 앞을 볼 수 없기에 솔거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는 완벽한 미인도를 완성하기 위해 그녀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되, 가장 중요한 눈동자만은 남겨둔다. 솔거와 처녀는 깊은 사이가 된다. 그러나 솔거는 처녀의 눈빛에서 순수함이 사라지고 '애욕'이 깃들었다고 느낀다. 순수함을 잃었다고 여긴 솔거는 분노 속에서 처녀를 교살하고, 죽어가며 발버둥 치던 처녀가 튄 먹물이 미인도의 눈동자에 원망의 빛을 새긴다. 이후 미쳐버린 솔거는 완성된 그림을 안고 성내를 떠돌다 눈밭에서 동사한다.


이 두 작품에서 인간은 철저히 미(美)의 재료로 전락한다. 예술은 인간을 고양시키는 힘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잔혹한 시스템이다. 작품은 남지만, 인간은 파괴된다. 폭력은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고, 예술가는 그 책임으로부터 한 발 비켜선다.


따라서 ≪광염 소나타≫와 ≪광화사≫의 예술가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윤리의 외부로 이탈한 위험한 주체이며, 예술은 구원의 통로가 아니라 광기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김동인은 이 지점에서 근대적 예술 신화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예술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끝까지 밀어붙인다.


장르문학의 렌즈로 본 절망의 이중주

김동인의 세계에는 두 개의 지옥이 공존한다. 하나는 살기 위해 스스로 무너지는 인간의 지옥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을 위해 타인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지옥이다. 이 두 지옥에는 구원도, 회복도, 윤리적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동인의 작품들은 장르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장르문학이 윤리와 구원의 안전망 없이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이른 텍스트들이다. 가난과 혈연 속에서 인간의 비인간화를 다루는 ≪감자≫와 ≪발가락이 닮았다≫는 오늘날 사회파 범죄소설이나 디스토피아 서사가 반복해 던지는 질문, “인간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를 이미 정확히 관통한다. 또한 ≪광염 소나타≫와 ≪광화사≫ 속 예술가는 현대 스릴러와 영화에서 반복되는 '예술가형 빌런', 혹은 창작 강박에 잠식된 인물의 선구적 형상으로 읽힌다.


김동인의 세계에는 끝내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속죄와 반성도, 예술에 의한 영혼의 정화도, 인간관계의 회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오랫동안 비윤리적이거나 냉소적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어 왔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장르문학적 관점에서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근대 서사의 형식적 필연이며, 인간 조건에 내재한 불안을 끝까지 밀어붙인 예술적 성취로 재해석될 수 있다.


그의 지옥은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가난은 여전히 인간을 타락시키고, 예술은 여전히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김동인이 그린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들'의 처절한 이야기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구원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