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편한 감정 드러내기

파블로 피카소와 팔레스타인 예술가 라얀 샤와브케

by 정물루

두바이에는 상업갤러리가 모여있는 알서칼 에비뉴(Alserkal Avenue)라는 지역이 있다. 우리가 부르는 '두바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이면 매년 아트위크가 열린다. 알서칼 에비뉴의 갤러리들은 일제히 새로운 전시를 오픈하고 아티스트 토크와 워크샵,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알찬 아트 축제의 바이브가 50도의 두바이 여름을 이겨내고 드디어 겨울이 오는 걸 맞이하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다만 2년 전, 2023년 그 이맘때는 달랐다. 이웃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10월에 시작되었고, 끔찍한 장면들이 매일, 아니 매 시간으로 일어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닌 나에게도, 그 영상과 사진들은 마치 전쟁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아트위크의 메인 공간인 알서칼 에비뉴의 콘크리트(Concrete)에서는 'On This Land'라는 팔레스타인 주제의 대형 전시가 열렸다.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권 작가들의 1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고, 그 속에서 서로의 연대와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장 안에서 오래된 팔레스타인 사진들과 그들의 예술 작품을 보고 있자니, 소셜미디어의 콘텐츠와 함께 오버랩되어 더 생생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UAE 로컬뉴스 The National의 전시 관련 기사 중의 이미지*


입구 한가운데에 걸려 있던 작품이 있었다. 라얀 샤와브케(Layan Shawabkeh)의 <Ladies of Gaza〉(2009) - 가자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이었다. 초록빛으로 물든 여인들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이나 귀, 혹은 배를 막고 있었다. 중앙의 여인은 임신한 모습이었고, 그 옆의 여인은 비어 있는 자궁을 드러낸 채 앉아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마음 깊숙이 저릿하게 찡했다.


어딘가 익숙한 형식이었다. 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입체주의의 첫 작품이라 불리는 그 그림처럼, 샤와브케의 여인들도 왜곡된 모습으로 재구성되어 있었다.


MoMA 홈페이지에서 캡쳐한 파블로 피카소의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피카소의 입체주의(Cubism) 첫 작품이라고 하는 이 작품은 다양한 관점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한 시점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고, 여러 시점에서 보는 걸 시각화한 것이다. 스페인 아비뇽의 창녀들을 주제로한 작품인데, 라얀 샤와브케는 이런 피카소의 작품을 탐구했다고 한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은 오랫동안 하나의 시점, 즉 신의 눈처럼 완벽한 시각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의 시초라고 하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는 그 단일 시점을 부수었다. 그들은 하나의 관점이 아닌, 여러 시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실을 그리려 했다. 대상을 정면, 옆면, 위, 안쪽에서 동시에 본 것처럼 표현하며, 사물을 쪼개고 재조립했다. 형태의 분석에 집중하기 위해서 컬러도 절제해서 사용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외형이 아니라, 그 속의 구조, 본질이었다.


샤와브케는 바로 그 형식을 빌려왔다. 하지만 그녀가 해체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녀의 입체주의는 여성을 바라보는 외부의 눈이 아닌, 그 주체인 여성이 바라보는 세상을 표현했다. 그녀들이 처한 삶, 사회적 위치, 정치적 상황 속에서의 절규하는 여성들을 그렸다. 여성, 전쟁, 폭력, 생명이라는 복합적인 현실을 하나의 시점으로는 결코 다 담을 수 없기에. 결국 세상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설명되는 않는 법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정치적 무의식>에서 말했듯이, 모든 예술에는 그 시대의 ‘정치적 무의식’이 깃들어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 않았더라도, 그 시대의 억압과 모순은 작품의 무의식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샤와브케의 그림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직접적으로 전쟁을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왜곡된 인체, 무표정한 얼굴, 푸른빛으로 병든 몸의 곡선들은 그 사회의 억압과 폭력이 만들어낸 무의식의 풍경이다. 그림은 그녀의 개인적인 병과 죽음,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집단적 상처를 조용히, 그러나 처절하게 증언하고 있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감정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감정은 몸과 몸 사이를 흐르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고통은 타인에게 전이되며 새로운 연대를 만든다. 샤와브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녀의 고통과 트라우마가 나의 몸으로 옮겨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것이 아메드가 말한, 감정의 사회적 순환이다. 그녀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게 만든다.



엄마이자 딸, 아내이자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파도 안 아픈 척, 힘들어도 괜찮은 척. 요즘 MZ들이 추구하는 ‘엔잡러’처럼,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사는 여성의 삶은 사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현실이다.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피로와 불안은 어딘가에 분명히 쌓여 남는다. 피카소나 샤와브케의 그림을 보면 그 감정들이 겹겹이 쌓인 내 안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불편한 감정을.


이 작품들을 계속 바라보다 보면 이 현실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위로를 받기도 하고 내가 안쓰러워 마음이 저릿해진다. 그리고 또 그렇게 우리의 삶이 흘러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우리가, 위대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https://www.thenationalnews.com/arts-culture/art-design/2023/11/20/on-this-land-an-exhibition-in-alserkal-avenue-is-a-triumph-of-palestinian-culture/?utm_source=chatgpt.com


**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9766


keyword
이전 06화보이지 않는 것들에 마음이 끌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