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휘발성이 높은 재희이지만 신발 밑창에 눌어붙은 껌처럼 끊질기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때는 초등학교 5학년즈음. 여름이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오면 마주 보이는 테니스장. 테니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아파트 단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곤 했다. 폭신한 우레탄 바닥이 맞이해 주는 그곳은 아이들의 만남의 장, 그 아이들을 따라온 엄마들의 작은 반상회 장소였고, 그 장면은 적적한 어르신들에게 TV 프로그램이 되었다. [#씬 1] 아이 넷이 배드민턴 채를 들고 뛰어온다. 바람이 많이 분다며 불평한다. 바람이 아닌 본인의 실력 탓인 걸 모르는 아이들이 귀엽기만 하다. 옆에선 학부모들의 이런저런 얘기. 5학년 3반 선생님이 글쎄.
재희도 이른 저녁을 먹고 19층에서 테니스장으로 단숨에 내려갔다. 줄곧 같이 놀던 17층 창정이 오빠도 있었다. 창정이 오빠는 재희에게 남다른 의미였는데. 맞벌이 부모를 둔 재희의 방과 후 일과는 집에서 티브이를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창정이 오빠가 같이 놀자고 하면 아싸.
어느 날은 102동으로 가는 길목 놀이터에 창정이 오빠가 놀고 있었다. 재희는 본인은 부르지 않았다는 작은 배신감과 그보다 훨씬 큰 반가움에 오빠에게 달려갔다. 처음 보는 오빠들과 같이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검은색 총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작은 총구에서는 불량식품 사탕처럼 보이는 흰 알맹이가 나왔다. 비비탄이었다.
재희에겐 총도, '남자 게임'의 룰도 머릿속에 없었지만 특유의 넉살로 무리에 다가갔다. 하지만 오빠는 재희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여자랑 노는 게 창피하냐. 당황한 재희는 오빠의 뒤통수만 보고 따라다녔지만 가위를 내듯 손가락으로 만든 총은 금세 시들해졌고 소외감이 들었다. 그러던 그때. 아악. 재희가 비비탄 총에 맞았다.
어디에 맞았을까. 오른쪽 팔? 왼쪽 등? 아니면 다리? 어디에 맞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다. 주사 맞는 느낌. 딱 그 정도. 누구의 총알에 맞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희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아픔보다는 창정이 오빠가 나를 챙겨주지 않았다는 서러움에. 나만 비비탄 총이 없다는 포모 심리에. 그리고 여자를 끼워주지 않는 오빠들에게 느끼는 어이없음에.
재희는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재희에게는 엄마와 나이차이가 적게 나는 이모 둘, 삼촌 둘이 배후에 있었기에 곧바로 큰삼촌에게 전화했다. "삼촌, 창정이 오빠야가~"로 시작하는 토로는 비비탄 총에 맞았다, 나도 비비탄총 사달라, 로 이어지다 결국에는 창정이 오빠가 본인과 놀아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끝났다. 앞의 말들로 주의를 돌리고 청자가 기운이 빠졌을 때쯤 흐릿하게 진심을 전달하는 것. 결국 오빠가 놀아주지 않아 서운했던 재희.
그 뒤로 창정이 오빠와 서먹해졌는지, 아님 다시 놀이터에서 옥상탈출을 하고 놀았는지 재희에게 기억이 없다.
아, 테니스장 얘기하고 있었지. 그래서 그날밤 테니스장에서 재희에게 어떤 일이 있었냐면.
-다음 화로 이어짐-
*픽세이브 장르로, 허구와 자전적 이야기가 혼합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