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b Marley - Get up, Stan up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음악의 난해함이 나를 밀어냈다. 친구가 좋다고 추천하는 음악을 들어보아도 어디가 어떻게 왜 좋은지 도무지 알 길 없었다. 음악시간에 배우는 음악 기초 이론도 나에겐 어렵기만 했다.
음악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선망했다.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혼자만의 음악에 심취해 있는 사람의 모습에는 신비한 아우라가 있었다. 노래를 잘하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은 나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 나에게는 없는 취향과 재능, 음악은 그렇게 내가 모르는 세계를 향한 질투심이 무엇인지만을 가르쳐주었다.
형도 음악을 좋아했다. 쌈짓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나 밴드의 앨범을 사 모았고 밤마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애청했다. 방바닥에 누워 라디오를 듣다가 최근에 빠져 있는 노래의 전주가 나오면 번개처럼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빛의 속도로 카세트플레이어의 녹음+재생 버튼을 눌렀다. 성공적으로 녹음이 시작되면 만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서렸다. 그럴 때 형은 평소와 매우 다르게 아주 우아해 보였다.
형처럼 하면 나도 신비하고 우아해 보일까 해서 형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어도 보고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은 내 안에 어떤 소란도 일으키지 않아서, 형이 지었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미소는 도무지 지어지지 않았다. 나의 어설픈 음악인 흉내는 며칠 만에 싫증이 났고 결국 수학을 포기하던 중학교 일 학년 즈음 음악도 함께 포기했다.
그 후로 음악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음악을 모른다고 사는 데 불편한 건 없었다. 음악이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하면 그뿐이었고 세상엔 음악을 대신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어차피 무협지나 게임에 빠져 살고 이성을 쫒아다니느라 음악을 들을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음악을 까맣게 잊고 살다가 스물두 살의 어느 날, 나는 음악과 행성처럼 충돌하고 말았다.
2002년 10월,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의 잔열도 식어가던 가을 나는 호주에 갔다. 영어도 배우고 여행도 하기 위해서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한시라도 빨리 호주로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래서 막상 멜버른에 도착했을 때는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해외여행의 설렘이나 이국적인 느낌, 일상을 벗어난 자유 등을 느긋하게 만끽할 새도 없이 바로 일을 구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주방보조 일을 구하고 한인 유학생이 전전세를 놓는 렌트하우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벌게 되자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영어라곤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는 일상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이래서는 굳이 힘들게 이 먼 호주까지 날아온 의미가 없었다. 식당일을 시작한 지 보름쯤 되었을 때 옆방 유학생에게서 농장에 대한 풍문을 들었다. 농장에 가면 돈도 많이 벌고 외국인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영어도 배울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나는 식당 일을 그만두고 바로 짐을 싸서 인력 소개소를 통해 멜버른에서 여섯 시간 정도 떨어진 미지의 농장으로 떠났다.
내가 찾아간 농장엔 정말로 한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 스웨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생수업 삼아 여행 온 앙드레 대니엘 닉 빅터, 대학교를 휴학하고 독일을 떠나온 마크와 케빈, 미국에서 혼자 여행 온 애노마리와 함께 일하고 어울리다 보니 비로소 여행의 실감이 들었다. 매일 저녁 거실에 모여 심슨을 보며 함께 웃고 테라스에 앉아 황홀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맥주병을 기울이고 각자의 삶과 꿈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처음 이삼일은 나에게 이제껏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종류의 충만감을 주었다. 이런 게 진정한 여행이구나 싶었다. 여행자들과 영어로만 대화하고 생활하다 보니 여행 오기 전 1년 동안 독학했던 영어에도 탄력이 붙었다.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환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곳은 없는 것인지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혹독한 노동의 강도가 그것이었다. 정오엔 40도를 육박하는 폭염 속에서 이른 새벽에서 황혼까지 밭의 고랑을 따라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걷고 또 걸으며 밑단의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 내 키높이의 상단에 고정하는 작업은 나에게 잔혹한 고문과도 같았다. 원래 약골인 데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내몰리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숙소에 돌아오면 침대에 시체처럼 쓰러졌고 밤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끝도 없이 걸어가는 악몽에 시달렸다. 몸은 하루하루 지쳐갔고 밭고랑을 따라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 포기와 극기를 병적으로 고뇌했다.
결국 농장 일을 시작한 지 열흘쯤 되었을 때 체력과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거기까지가 나라는 인간의 한계였던 것이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꼭 강한 존재가 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자신을 고통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한 번 태어난 이상 힘든 일은 피하고 즐거운 일만 찾아 즐기다 가면 그만인 인생이다 싶었다. 멜버른에 돌아가 비행기 표값만 벌어서 한국으로 돌아가자 마음 먹었다. 몇날 며칠 고민했는데, 막상 그만두겠다고 결심하니 그동안의 번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홀가분했다. 이제 마지막이 될 작업을 마치고 농장주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별 말 없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는 농장주의 눈빛엔 실망감이 역력했지만 아무려나 후련한 마음으로 녹초가 된 몸을 출퇴근용으로 이용하던 숙소 주인 소유의 6세대 시빅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아주 미약하나마 일말이 미련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약하기만 한 자신에게 실망하고 이 정도 시련도 이겨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가련해 하는 마음이 옹이져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탄 차가 농장을 빠져나가는 데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계속 밀려 올라오더니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창피한 눈물과 우울한 심정을 앙드레 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갈색의 황량한 풍경이 크로키처럼 스치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만둔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 채로.
그때였다. 아날로그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멘트가 끝나면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신나고 들뜬 리듬의 전주는 괜히 패잔병 같은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 불쾌했다. 그런 나의 심정에 상관없이 짧은 전주 끝에서 보컬이 나오는데, 노래의 가사가 행성이 충돌하듯 나에게 육박해왔다.
Get Up, Stand Up, stand up for your right
Get Up, Stand Up, stand up for your right
Get Up, Stand Up, stand up for your right
Get Up, Stand Up, don't give up the fight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어서 너의 인생을 위해(그때 나는 right을 life로 잘못 들었다.) 일어나'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육성은 엄청난 위력으로 내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생전 처음 듣는 노래였다. 가수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었던 것인지 머릿속이 온통 하예지는 느낌이었다. 하얀 공백에 음악만 남았다. 한 번도 만나 적 없는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지치고 절망한 나를 위해 일어나라고, 너의 싸움을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곧 빛이 보일 거라고, 최대한의 진정성을 담아 말해주고 있었다. 가뜩이나 구멍 난 눈물샘이 터졌다. 더 이상 울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음악이 끝나고 아나운서의 멘트와 다른 노래들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나는 나를 강타한 노래의 여운에 몸서리쳤다. 뇌리에 남은 후렴이 그날 밤까지 메아리쳤다. 그리고 이튿날 나는 노랫말처럼 일어났다. 어제처럼 농장에 가서 농장주에게 다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어차피 일손이 필요했던 농장주는 내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다시 한번 잘해보자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을 통해 관용이나 믿음 같은 뉘앙스가 내 몸안으로 밀려드는 듯했다. 문득 그걸 져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도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를 응원해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내 안에 아직 그럴만한 기력이 남아 있었나 의아해하면서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고된 농장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이곳에 오면서 목표로 정했던 한 달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Get up, Stand up]은 밥 말리의 노래였다. 밥 말리는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해인 1981년에 뇌종양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그로부터 무려 20년을 거슬러 오르고 몇 개의 대륙을 가로질러 호주의 어느 벽촌에서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분명하게 와 닿았다. 밥 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음악으로 혁명을 일으킬 순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칠 순 있다. 그렇기에 레게는 단순히 신나는 음악이 아니다." 정말 그랬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의 음악은 나를 찾아와 나를 깨우쳤다. 그의 음악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다른 기억을 가진 다른 인간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고 편한 것만 찾아 사는, 썩 나쁘진 않지만 어떤 드라마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그런 자신과 인생을 사랑할 수 없는 어떤 존재로 지금을 살고 있진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 현기증처럼 아찔하고 그 노래와의 운명적인 만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그리고 음악이 무언지 조금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음악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음악이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라는 것, 그런 음악을 만났을 때 우리는 위로받고 마음의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 그렇게 삶이 변한기도 한다는 것.
한 달 사이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새로 왔다. 그리고 이제 내가 떠날 시간이었다. 떠나기 전날 친구들은 나를 위해 소소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우리는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고 앞으로의 삶을 축복했다. 그날 밤,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잉걸불에 반짝이는 우리의 눈빛이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던가. 이튿날 작별 인사를 하고 홀로 마을을 배회하다 멜버른행 밤버스를 탔다. 몇 사람 타지 않고 에어컨까지 가동해 스산하기만 한 그레이하운드는 타운을 빠져나가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느리게 올랐다. 나선으로 휘어지며 떠나온 곳이 드러나는 그 길 끝에 내가 잠시 머물렀던 작은 타운이 몇 안 되는 미약한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담한 야경이었다. 도로가 다시 반대로 휘어지며 마을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시선을 조금 들어 올렸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억만 개의 별들이 서로 경쟁하듯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득한 우주였다. 소금처럼 쏟아지는 엄청난 별빛들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멍해진 뇌리로 지난 한 달 동안의 장면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물선 벽촌에 처음 도착한 순간, 낯선 여행자들과의 어색한 만남과 미숙한 작별, 농장을 오가며 보았던 황홀한 노을들, 지독한 폭염, 이마에 맺히던 비지땀, 독사가 출몰해 엉덩이가 빠지게 도망쳤던 해프닝, 모든 걸 체념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순간 예의 음악과 충돌했던 결정적 장면, 크리스마스이브 밤 열두 시에 동네 수영장 울타리를 넘어 도둑 수영을 했던 일, 숙소 거실에 모두 모여 VB(victoria beer)를 마시며 카운트다운을 세고 나서 "해피 뉴 이어"를 목청껏 외치던 일, 그리고 밤버스에 앉아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지금을 마지막으로 멈추는 한 편의 파노라마. 문득 나를 둘러싼 이 순간의 모든 것이 경이로워서 눈물이 흘렀다. 시빅의 뒷좌석에서 흘렸던 눈물과는 온도도 질감도 다른 눈물이었다.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이 하나의 노래였다. 그 노래가 없었다면 쓰이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이 플레이리스트 No.1은 언제나 [Get up, Stand up]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