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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 Jan 25. 2024

나의 선한 외할머니 1

주황주황 꽃손톱

나의 외할머니는 조용하신 분이었다. 감정표현도 많이 없으시고 묵묵히 성실히 할 일을 하시는, 고생을 많이 하셔서 삶의 희로애락이 이마의 깊은 주름에 묻어 있으셨던, 내 기억에 누구에게도 큰소리 한번 치신적 없는 선한 사람이었다.



아빠 회사 사택에서 신혼살림를 시작한 부모님은 몇 년 후, 홀로 외로우실 외할머니를 걱정해서인지 외할머니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집을 장만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그곳에 가거나, 외할머니가 거의 매일 우리 집으로 오시곤 했다. 엄마의 살림을 도와주시기도 했고 쉬실 때는 내가 귀를 파드리기도 했는데 정말 바싹 마른 노오란 귀지가 나오면 할머니는 시원하다고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옆사람의 맥주에 귀지를 넣었는데 그걸 마신 사람이 죽었다는 괴담까지,, 그래서 그 시절 나는 귀지를 먹으면 죽는 줄 알았다. 그 위험한 귀지가 손에 묻거나 흩어지지 않도록 엄청 조심조심 휴지에 씨서 버렸다.



할머니집은 아궁이에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옛날 집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나무가 타고난 후에 나는 재냄새가 났었고 그것은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긴 마당 한켠에는 4~5마리의 닭이 있는 닭장이 있었고 조그만 텃밭도 있었다. 마루에는 책상같이 생긴 재봉틀이 있었는데 바느질로 엄마와 생계를 이어가던 할머니의 추억담긴 물건이었다. 마루의 벽에는 외할머니의 엄마 사진과 친척들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외할머니 본인의 큰 사진도 있었다. 그 사진의 용도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되었다.








할머니 손가락 두세 개는 늘 아주 진한 주황색 봉숭아물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의 취미생활이었을까.. 늦여름 봉숭아 꽃이 필 때엔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텃밭에 피어있는 봉숭아 잎과 꽃을 따서 절구에 넣고 마루의 높은 선반에서 투명한 덩어리를 꺼내어 쪼개서 넣었다. 뭔지 몰라 무서웠지만 그것이 있어야 찐하게 색이 나온다 하니 할머니를 믿어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백반 덩어리였던 것 같다. 나는 꽃을 많이 넣어야 꽃처럼 이쁜 색이 나올 거 같은데 할머니는 주로 잎을 많이 넣곤 했다. 잎에서 색이 많이 나온다고,, 진짜일까??




그리곤 빨강 초록한 반죽을 손톱 위에 올리고 비닐로 감싼 후, 새어 나오지 않도록 실로 묶어 주었다. 그 상태로는 손가락이 고장 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주로 낮잠을 잤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대로 잘 묶여 있기도 했지만 막 새어 나온 반죽도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조심스레 비닐을 풀어보면 발그레 주황주황한 손톱이 나왔다. 겨울에 첫눈이 올 때까지 그 꽃손톱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데 첫사랑이 뭔지 아직 모르는 나는 그저 꽃손톱이 좋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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