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포 벤데타’라는 영화가 있다. 특이한 가면, 즉 가이 포크스 마스크를 쓴 주인공은 영화에서 ‘11월 5일을 기억하라’고 외친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 즉 웨스트민스터 궁전을 폭파하는 장면이 나온다. 궁전 폭파와 가이 포크스 마스크는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과연 여기에는 어떤 역사가 담겼을까?
1.
1527년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교황에게 왕비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교황에게 청원했다. 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교황은 교회법을 거론하면서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화가 난 헨리 8세는 가톨릭과의 단절을 선언했고 스스로를 영국 교회 수장으로 선포하면서 모든 신도에게 충성을 요구했다. 반발하는 가톨릭 사제와 신도 수백 명은 처형했다. 800개 이상의 종교 단체를 해산하고 자산을 압수했다.
헨리 8세와 후계자 에드워드가 죽은 뒤 헨리와 캐서린의 딸인 메리가 여왕이 됐다. 그녀는 아버지와는 달리 가톨릭을 옹호했다. 스페인 출신 어머니를 따라 가톨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보수적이었던 메리 여왕은 프로테스탄트 300명 이상을 처형했다. 이 때문에 그녀에게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메리 여왕은 단명했다. 겨우 5년 반만 집권한 뒤 세상을 떠났다. 1558년 메리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왕좌에 올랐다. 그녀는 메리와 반대로 프로테스탄트였다. 종교개혁을 단행했고, ‘엘리자베스 종교 합의’라는 새로운 법규를 제정했다. 공직에 취임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에서 현직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규를 따르지 않고 위반하는 사람은 수감하거나 처형했다. 가톨릭은 거의 불법이 되다시피 했고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아 가족이 없었고,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었다. 그녀는 1603년 눈을 감았는데, 가톨릭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라를 영국 여왕으로 즉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재무상이었던 로버트 세실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를 서둘러 국왕 자리에 앉히는 바람에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가톨릭은 할 수 없이 새 국왕에게 지지를 선언했다. 그들은 제임스 1세가 가톨릭을 좀 덜 가혹하게 다루고 좀 더 많은 종교적 권리를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임스 1세는 과거 역대 국왕의 가혹한 법률을 계속 유지했다.
가톨릭은 할 수 없이 제임스 1세를 권좌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신부인 윌리엄 클라크와 윌리엄 왓슨은 이른바 ‘바이 음모’를 획책했다. 제임스 1세를 납치해 런던 타워에 가두고 가톨릭 적대 정책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들통 났고, 관련자는 모두 붙잡혀 처형당했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가톨릭 신도인 엘리자베스의 사촌 동생 아라벨라 스튜어트를 여왕으로 앉히려는 계획도 있었다. ‘메인 음모’라는 이 계획도 사전에 발각됐다.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던 프랑스의 앙리 3세 국왕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연이은 실패에 고민하던 가톨릭은 ‘건파우더 음모’라는 새로운 계획을 준비했다. 그들은 제임스 1세를 폭사시킨 뒤 아홉 살 딸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를 여왕으로 앉히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는 달리 가톨릭 신도였다.
거사에는 가톨릭 신도 수십 명이 가담했다. 주모자는 귀족인 로버트 케이츠비였다. 장신에 미남인데다 대담하고 검술에 능숙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동지를 모아 여러 달에 걸쳐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 1년여 전인 1604년 5월에는 케이츠비와 토머스 윈터, 존 라이트, 토마스 퍼시, 가이 포크스 등이 참가한 모임이 열렸다.
“내년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의회가 개원하는 날을 거사일로 잡읍시다. 의회를 무너뜨리고 국왕을 폭사시키면 일거양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영국에서는 의회 개원일에 국왕이 참석하는 게 관례였다. 대부분 귀족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고위 인사도 함께 참석했다. 가톨릭으로 봐서는 이날 개원일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암살에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은 폭약을 웨스트민스터 궁전 가까이에 가져다놓는 것이었다. 거사 가담자 중 한 명이었던 토머스 퍼시가 일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여러 건물로 이뤄졌다. 상하 양원과 법원은 그런 건물 가운데 일부였다.
궁전 주변에는 상점, 숙박시설이 많아 상인, 변호사 등이 살기도 했다. 퍼시는 여러 건물 중에서 궁전에 가장 가까운 곳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의회와 연결되는 계단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이 건물에는 지하 저장고가 있었는데 마침 상원 바로 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건물이 의회와 가까웠던 것은 중세에는 궁전의 부엌으로 사용되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폭약에 불을 붙여 폭발시키는 역할은 가이 포크스가 맡기로 했다. 음모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포크스는 10년 이상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어 이 일을 담당하게 됐다. 그는 몰래 폭약 36통을 하나씩 저장고로 옮겼다.
건파우더 음모는 편지 한 장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의회가 열리기 하루 전, 의문의 사내가 몽티글 자작 윌리엄 파커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커 경은 음모 가담자 중 한 명의 사촌이었다. 그는 편지를 세실에게 가져다주었다. 당연히 세실은 편지를 제임스 국왕에게 보여 주었다. 편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파커 경. 당신의 친구입니다. 저는 당신이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신과 인간이 시대의 사악함을 처벌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조언을 농담으로 듣지 마시고 안전한 시골 영지에 가서 숨어 계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별다른 조짐이 없어 보이지만 의회는 곧 끔찍한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없을 겁니다. 이 충고는 당신에게 좋은 일이므로 절대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임스 1세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안팎을 당장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경찰과 군인 수백 명이 궁전을 샅샅이 뒤진 끝에 11월 4일 인근 건물 지하 저장고에 숨은 포크스와 폭약 36통을 찾아냈다. 기폭장치도 달린 폭약이 얼마나 많았던지 저장고의 넓은 공간을 절반 이상 채울 정도였다. 불을 붙이기만 하면 10초 이내에 모두 터질 수 있는 상태였다.
경찰은 포크스를 런던 타워에 가두고 음모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당연히 고문도 불사했다. 포크스는 오랫동안 버텼지만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해 음모 가담자의 이름을 모두 불고 말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그들의 이름을 모두 적었다.
경찰은 포스크가 밝힌 음모 가담자를 모두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음모 가담자 중 일부는 교수형을 당했고, 일부는 능지처참으로 끔찍하게 죽었다. 다른 주모자인 케이츠비와 토머스 퍼시는 체포를 피해 달아나다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폭파임무를 맡은 가이 포크스는 가장 나중에 처형됐다. 그의 몸은 산산조각 나 영국 곳곳으로 보내져 반역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오랫동안 전시됐다.
쇼킹한 역사였던 건파우더 음모는 영화, 연극, 문학, 음악 등에서 인기 소재로 사용됐다. 영화로 인기를 끈 ‘V 포 벤데타’는 원래 1980년대 유명 만화였다. ‘V 포 벤데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이 쓰고 다니는 ‘가이 포크스 마스크’다.
가면의 유래는 본파이어 나이트라는 축제였다. 목숨을 건져 한숨을 돌린 제임스 1세는 측근에게 많은 국민이 모인 가운데 큰 모닥불을 피워 ‘가장 악랄한 주동자’인 가이 포크스의 인형을 태우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다음해부터는 본파이어 나이트 또는 가이 포크스 나이트라는 축제로 변해 매년 11월 5일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어린이들은 축제 때에는 가면을 쓴 가이 포크스 인형을 들고 집집마다 돈이나 선물을 얻으러 다녔다. 나중에는 어린이들이 직접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기도 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 영국에서 유행하자 영연방에 속한 다른 나라에도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