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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28. 2024

필립 오귀스트의 루파라



1190년 7월 3일 아직 초여름인데도 프랑스 파리에서는 더위가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환히 비추는 달과 마치 보석처럼 무수히 빛나는 수많은 별도 더운 날씨가 괴로운지 헉헉대는 것처럼 보였다. 


도도히 흐르는 센강을 내려다보는 시테 섬의 시테 궁전 성채에 사람 하나가 얼씬거렸다. 그는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몇 걸음 뒤에서는 기사처럼 보이는 서너 명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늦은 밤 성채에 선 사람은 프랑스의 국왕 필립 오귀스트였다. 그는 10년 전 아버지 루이 7세의 뒤를 이어 왕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이전의 역대 국왕은 이른바 ‘프랑크족 왕’이었지만 그는 역사상 최초의 ‘프랑스 국왕’이었다. 


필립 오귀스트는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 자리에 앉힌 선구자로 평가받는 국왕이었다. 정부 조직을 재편하고 재정 안정을 회복했으며, 귀족 권력을 제한하는 대신 각 도시가 자치권을 확대하고 부르조아가 성장할 수 있도록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또 파리를 실질적인 수도로 삼아 프랑스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시테 섬에 있던 왕궁인 팔레 드 라 시테, 특 시테 궁전 주변의 도로를 돌로 포장한 것은 물론 파리의 주요 도로를 정비했으며, 센강을 건너다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었다. 게다가 노트르담 대성당 건설 공사를 시작했고, 청년 교육을 위해 성당 학교를 학생, 교수가 조합을 이뤄 교육을 실시하는 새로운 교육시설로 바꿨다. 이 새 교육기관은 나중에 파리 대학교로 발전했다. 


필립 오귀스트는 날이 밝으면 멀리 중동의 예루살렘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날 예정이었다. 이미 많은 병사가 파리 외곽에 모여 출발을 기다렸고, 그는 이들을 데리고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로 가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함께 배를 탈 계획이었다.


대업을 하루 앞두고 필립 오귀스트가 고민에 빠진 것은 파리 때문이었다. 그가 프랑스를 떠나 원정을 갈 경우 리처드가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리처드뿐이라면 어떻게 대처해볼 수 있겠지만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에 거점을 잡은 바이킹도 파리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늘 리처드를 경계하라고 하셨어. 아버지 말씀처럼 리처드는 물론이거나나 영국인이라면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그놈들은 틈만 나면 프랑스에 쳐들어와 영토를 빼앗으려고 할 거야. 리처드가 나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는 척 하면서 몰래 숨겨둔 병사를 파리로 보내 공격을 시도할 수도 있어.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하나?’


필립 오귀스트가 파리에 머물 때는 영국이나 바이킹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와도 대처할 수 있지만, 부재 시에는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큰아들 루이 8세는 겨우 세 살이어서 나라를 맡길 형편이 아니었다. 아내 이사벨라는 아주 현명하고 사려 깊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지만 이미 여러 해 전에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십자군 원정에 불참할 수도 없었다. 3년 전 이슬람군 총사령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바람에 유럽 기독교가 총력전을 펼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리처드는 물론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1세까지 세 명이 연합군으로 나서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원정에 불참한다면 당장은 편하겠지. 하지만 결국에는 여러 나라의 원성을 사게 돼 나는 물론 프랑스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거야. 게다가 로마 교황청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필립 오귀스트는 뒤에 선 기사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자문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다른 귀족들에게도 자문을 구하려고 했지만 누구도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리처드와 바이킹의 공격에서 파리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나?”


가장 앞쪽에 선 기사 한 명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부르군디 공작 위그 경이었다.


“시테 섬처럼 파리 전체를 에워싸는 성벽을 쌓으시죠.”


“성벽을?”


“바이킹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공격합니다. 과거에도 여러 번이나 그런 식으로 파리를 공격했습니다. 강변에 닿는 성벽을 쌓으면 강을 통한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영국이 쳐들어오면 주변의 백성을 모두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면 됩니다. 성 안에서 버티면 영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 겁니다.”


사실 필립 오귀스트도 이미 성벽 건설을 대책으로 생각하던 터였다. 하지만 성벽을 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완성 전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무용지물이어서 고민하던 차였다.


“성벽을 지으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완성 전에 영국이나 바이킹이 쳐들어오면 곤란할 겁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성벽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면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만큼 나라를 지키는 데 큰 힘이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필립 오귀스트는 위그 경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공사를 서둘러 시작하고, 나도 십자군 원정에서 일찌감치 돌아오면 되겠군. 황제나 리처드에게는 바이킹이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있다고 핑계를 대고.’


필립 오귀스트는 다음 날 아침 십자군 원정에 나서기 위한 출정식에서 파리에 남는 귀족들에게 성벽 공사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프랑스 곳곳으로 파리에 성채를 새로 짓는다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지시도 내렸다. 더 이상 함부로 파리에 쳐들어와서 약탈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리려는 게 그의 속셈이었다.


필립 오귀스트가 만든 성채는 높은 원형 탑을 가진 방어용 성채였다. 탑에서 내려다보면 센강을 따라 오가는 모든 사람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그래서 강을 따라 거슬러오는 모든 배를 감시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화살을 쏘아 견제하기도 쉬웠다. 


성채는 서쪽으로는 센강에 접하고 남북쪽으로는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 일대를 에워싼 형태였다. 성채는 양 측면 70m, 앞뒤 쪽 80m 규모의 사각형 구조물이었다. 당시 파리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곳이어서 이 정도 규모 성채만으로도 대부분 지역을 보호할 수 있었다.


성채의 출입구는 두 곳이었으며, 주변은 폭 10m의 해자로 둘러싸였다. 해자를 만든 것은 최악의 경우 시떼 섬의 궁전에 사는 왕실이 성채로 피신해 농성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성채에는 25m 간격으로 20m 높이의 둥근 탑을 쌓았다. 간격을 25m로 둔 것은 탑에서 쏜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파리를 성벽으로 에워싸고 성채를 만드는 공사는 필립 오귀스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난 기간 중에 끝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 동안에 영국이나 바이킹이 파리를 쳐들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십자군 원정에 나선 지 1년 만인 이듬해 7월 모든 병력을 이끌고 고향인 파리로 무사 귀환했다. 성채 공사는 시작한 지 12년 만인 1202년에 끝났다. 


필립 오귀스트는 재임 기간에 성채 12개를 건설했다. 파리 성채는 그중 하나였다. 그는 파리 성채를 건설할 무렵 이미 모범 설계도를 갖고 있었다. 성채의 규격, 사용하는 돌의 크기 등은 규격화돼 있었다. 다른 나라 왕이나 지역의 영주는 성채를 지을 때 울퉁불퉁한 돌을 그냥 사용했지만 필립 오귀스트는 돌을 깎아 정해진 규격으로 만들어 성채를 쌓았다. 돌의 크기는 언제나 높이 30cm, 폭 70cm, 길이 75~80cm였다. 


공사도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면서 시킨 게 아니라 특정 건설단을 구성해 그들에게만 건설을 맡겼다. 당연히 다른 성채보다 튼튼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 오귀스트가 성채를 쌓기 전 센강 양쪽에는 작은 마을 여러 곳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지 살지는 않았다. 마을 방어시설이라는 게 나무 벽이나 울타리가 고작이어서 외적 침략에 너무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필립 오귀스트가 성채를 건설함으로써 비로소 파리는 시테 섬에서 벗어나 더 넓은 구역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왕실로 봐서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 기반을 만든 셈이었다. 성채는 결과적으로 단순한 방어용 시설에만 그친 게 아니라 파리의 팽창과 도시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필립 오귀스트는 성채를 완성한 뒤 ‘루파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 루파라라고 불렸는지 그 이유와 관련해서 여러 가설이 전한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라틴어 ‘늑대’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당시 성채가 있던 곳에 늑대가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루파라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다. ‘성’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파라’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신호를 보내는 탑’을 뜻하는 색슨족 언어 ‘루베아르트’에서 파생했다는 가설도 있다. 


루파라의 어원이 무엇이든간에 루파라는 나중에 루브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루브르는 궁전이 됐다가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직후 박물관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필립 오귀스트가 건설한 루브르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100%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설계도나 그림이 남은 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1984~1985년 루브르 박물관 지하 발굴 작업 덕분에 대충 형태는 알 수 있게 됐다.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옛 성터로 보이는 지하 구간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과거 첫 루브르의 해자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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