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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07. 2024

잘츠부르크(3) 대공-대주교의 도시


‘굿 럭’을 기대하면서 잘츠부르크대성당을 향해 걷는다. 장크트페터수도원에서 불과 1~2분 거리이니 그야말로 지척이다. 대성당 앞에는 너른 광장이 펼쳐져 있다. ‘대성당광장’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돔플라츠다. 광장 한가운데에 성모마리아 동상이 세워져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



잘츠부르크대성당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잘츠부르크 시민의 종교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의 중심지였다. 대성당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767년이었다. 당시 잘츠부르크 주교였던 성 베르길리우스가 성 루프레흐트에게 헌정하기 위해 성당을 건설했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성 루프레흐트는 잘츠부르크라는 도시를 재건한 사람이었다. 고대에 켈트족(갈리아족)이 살 때에는 유바붐이던 도시의 이름이 중세에 잘츠부르크로 바뀐 것은 그의 덕분이었다. 성 루프레흐트가 아니었다면 잘츠부르크라는 도시는 지금 아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조그마한 시골 마을로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잘츠부르크의 첫 수호성인이 된 것은 이런 관점에서 당연한 일이다.


대성당 정면은 운터스베르크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정면에는 조각상 4개가 설치됐다. 측면에 있는 두 석상은 성 루프레흐트와 성 베르길리우스다. 소금통을 든 사람이 성 루프레흐트, 성당을 든 사람이 성 베르길리우스다. 중앙의 두 석상은 열쇠를 쥔 성 베드로와 칼을 쥔 성 바오로 석상이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는 세상의 성당을 상징한다. 



잘츠부르크대성당은 1756년 1월 27일에 태어난 모차르트가 다음날 유아 세례를 받은 곳이다. 대성당에는 그 흔적이 두 곳에 남았다. 하나는 그의 몸을 담근 침례반이다. 작사가 요셉 모어도 잘츠부르크대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럴송인 ‘고요한 밤’을 작사한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것은 1792년 12월 11일이었으니 모차르트가 태어나고 36년 뒤였다. 


모차르트 유아 세례의 다른 흔적은 세례 기록을 담은 등기서류다. 기록을 남긴 사람은 레오폴트 람프레흐트다. 당시 잘츠부르크대성당의 행정 담당 신부였다. 서류에는 모차르트의 이름이 라틴어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우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라고 기록됐다. 


모차르트는 1779~81년 잘츠부르크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승격됐다. 잘츠부르크대성당의 음악을 책임지는 게 주요 임무였다. 대성당에서 연주할 음악을 작곡하는 것은 물론 대성당 오르간을 직접 연주하거나 대성당 합창단 소년들을 가르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대성당에 남긴 최고 유산은 ‘대관식 미사 C장조(KV 317)’였다. 이 곡은 1779년 4월 4일 대성당에서 거행된 부활절 미사에서 초연됐다. 이날 대성당 신도석에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대관식 미사’를 들은 신도들은 하염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는 음반이나 유튜브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직접 현장에서 듣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날짜를 잘 골라 잘츠부르크대성당에 가면 들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관식 미사’를 연주한다. 물론 무료는 아니다. 입장권을 사야 한다. 


좌석에 앉아 두 눈을 감으면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가슴에서 돌연 신앙심이 솟아나오는 기적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만큼 위대하다.



잘츠부르크대성당에는 오르간 다섯 대가 설치됐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살 때 늘 연주했던 오르간이었다. 대성당처럼 오르간도 큰 피해를 입었다가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했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알프스 북부에서 오르간 다섯 대를 가진 성당은 하나도 없다”면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웅장한 오르간을 보면 그들의 자부심을 납득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이 좋으면 무료나 유료로 오르간 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다. 일요일 미사나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수시로 오르간이 연주된다. 물론 연주되는 곡은 대부분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이다.


잘츠부르크대성당의 서쪽, 남쪽, 북쪽은 광장으로 둘러싸였다. 동쪽만 유일하게 광장이 아니라 골목길이다. 서쪽은 돔광장, 북쪽은 레지덴츠광장, 남쪽은 카피텔광장이다. 세 광장에서는 1년 내내 많은 행사가 펼쳐진다. 잘츠부르크 축제, 크리스마스 마켓, 성 루프레흐트와 성 베르길리우스 축제, 브라스 뮤직 축제 등이다. 한 해 동안 돔 광장 등에서 각종 행사가 열리는 날짜는 200일 안팎이다. 여름철 주말에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면 여러 광장에서 각종 행사가 상시적으로 진행되는 걸 볼 수 있다. 


돔광장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성모 마리아 석상이다. 1766~71년 요한 밥티스트 하겐나우어가 만든 조각이다. 그는 모차르트 가족이 살았던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 저택의 주인인 로렌츠 하겐나우어의 친척이었다. 



7~8월 잘츠부르크 축제 기간 중 돔광장에는 3천 석 규모의 임시 관람석이 설치된다. 성모 마리아 석상 앞에는 무대가 만들어진다. 이곳에서 해마다 공연되는 작품은 오스트리아 극작가 겸 소설가 휴고 폰 호프만스탈이 쓴 연극 ‘예데르만’이다. 1920년 8월 22일에 열린 제1회 축제의 개막작이었다. 호프만스탈은 축제를 창립한 5명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생각한 축제의 이념은 ‘종교, 사상, 언어, 민족, 인종, 문화에 관계없이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는 대주교가 두 명이다. 한 명은 빈에, 다른 한 명은 잘츠부르크에 대주교 교구를 두고 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도시의 정치적 지배자인 대공을 겸임했다. 그래서 대주교는 성당이나 수도원이 아니라 궁전을 따로 만들어 살았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겸 대공이 살았던 궁전은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레지덴츠였다.


레지덴츠로 들어가는 입구는 레지덴츠광장 쪽에 있다. 이곳에는 정원이 4곳이나 된다. 입구로 사용되는 곳은 광장 쪽에서 들어가면 곧바로 나타나는 메인 정원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쪽 벽면에 붙은 헤라클레스 조각상이다. 조각상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레지덴츠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레지덴츠에는 방과 홀이 무려 180개에 이른다. 귀빈실만 15개다. 카라비니에리 홀, 기사의 방, 회의장은 물론 전실, 접견실, 서재, 개인 예배당을 갖춘 침실, 미술관, 휴게실에 이르기까지 방의 종류와 용도는 다양하다. 정원도 4곳이나 된다. 입구로 사용되는 곳은 주 정원이다. 


레지덴츠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라비니에리 홀이 먼저 나타난다. 레지덴츠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데, 홀로 내려가는 대리석 계단 벽에는 라틴어 철자인 ‘I.E.A.P.S’가 적혀 있다. 레지덴츠를 대폭 수리한 대주교 요한 에른스트의 이름 약자다. 


다른 유럽 여러 도시의 궁전처럼 레지덴츠에는 그림이 많다. 액자에 담은 별개의 작품은 물론 벽화, 천장화에 이르기까지 그림 종류는 다양하다. 상당수는 오스트리아 화가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어와 이탈리아 화가 마르티노 알토몬테가 그렸다. 제작 시기는 1710~14년이었다. 



레지덴츠의 벽화, 천장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 인물의 인생을 시리즈로 담았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BC 4세기 그리스의 위대한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다. 레지덴츠를 대폭 개보수한 에른스트 대주교가 알렉산더를 매우 좋아해서 그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대표적인 곳은 리저탈, 즉 ‘기사의 방’의 천장화다. 여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애마 부케팔로스를 아버지에게 자랑하는 장면, 인도의 왕 포루스를 납치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팜필리아 바다의 기적, 포루스를 왕국에 돌려보내는 장면, 가우가멜라 전투를 벌이는 장면도 보인다. 기사의 방은 대주교 통치 시절에 주로 실내악을 연주하던 콘서트홀이었다. 모차르트가 오라토리오 ‘첫 계명의 의무 K35’와 ‘양치기 왕 K208’을 공연한 장소는 이곳이었다. 



레지덴츠 3층에는 미술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16~19세기 유럽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이 볼 만한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관을 지나면 대성당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나온다. 복도를 따라 가면 창 양쪽으로 돔광장과 레지덴츠광장이 보인다. 복도 맞은편에서는 대성당 2층이 나타난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대성당과 2층에서 내려다보는 대성당의 위용은 다르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위쪽이다 보니 더 웅장하고 거룩하다는 인상을 준다.  


레지덴츠는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일부 공간은 박물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잘츠부르크 대학교 강의실로 사용되는 공간도 있다. 



모차르트가 음악을 연주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레지덴츠에서는 모차르트 연주회가 수시로 열린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기사의 방이다. 이곳은 음향 상태가 정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선 분수의 방’이라는 뜻인 피시브루넨잘에서는 관광객 상대 연주회가 진행된다. 피아노는 물론 바이올린 곡까지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모차르트가 레지덴츠에서 데뷔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관광객은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연다. 연주를 들어본 사람 중에서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연주자가 모차르트가 아니라는 점을 아쉬워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다섯 살 때 모차르트의 연주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레지덴츠에서 나오는 여행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있다. 레지덴츠광장 한가운데에 선 모차르트 동상이다.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아온 사람이라면 동상 옆에서 사진을 한 장 찍어도 좋은 노릇이다.


동상 건립이 시작된 것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36년 뒤인 1835년 8월 10일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보험계리인 지그문트 폰 코플레른이라는 사람이 모금운동을 벌여 동상을 만들었다. 


동상 제막식은 1842년 9월 4일 미카엘광장, 오늘날 모차르트광장에서 열렸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자베르 볼프강 모차르트도 행사에 참석했다. 프란츠 자베르는 아버지를 기리면서 직접 작곡한 칸타타를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부인이었던 콘스탄체 베버는 제막식 6개월 전인 3월 6일에 세상을 떠나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다만 살아있을 때 인근 카페 토마셀리 2층의 셋집에서 동상을 제작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미완성인 동상 너머에서 모차르트가 열성적으로 피아노를 두들기는 모습이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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