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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18. 2024

부다페스트 둘째 날(2) 시씨가 사랑한 부다왕궁


시씨 케이크를 사 먹지 못한 아쉬움을 가득 안고 성마차슈대성당 앞의 성삼위일체광장에서 타르녹 거리를 따라 걷는다. 5년 전 겨울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는 밤새 눈이 잔뜩 내려 거리는 온통 하얀 눈에 덮였다. 머나먼 이국에서 눈길을 걷는 기분은 낯설면서 설레었다. 지금은 10월이어서 눈이 내리는 시기가 아니다. 두어 달은 더 지나야 이곳에도 눈이 내린다. 



대부분 관광객은 부다성에 올라가면 성마차슈대성당과 부다왕궁만 둘러보고 다시 내려가 버린다. 그들은 부다성 곳곳에 쏠쏠한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곳곳에 헝가리 근현대사의 흔적이 얼마나 많이 뿌려졌는지 잘 모른다. 


타르녹 거리에도 아주 유명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부다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는 시설이 더러 있다. 그중 하나는 ‘황금색 왕관을 쓴 독수리 간판’이 벽에 붙은 ‘황금 독수리 약국 박물관’이다. 부다페스트를 점령했던 오스만투르크가 17세기 물러난 뒤 부다에 처음 생긴 약국 자리에 만든 박물관이다. 엄청난 자료가 전시된 것은 아니지만 17~18세기 유럽의 약국은 어떤 형태였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 바로 인근에는 ‘드라큘라의 미궁’으로 불리는 흥미로운 동굴이 있다. ‘드라큘라 백작’으로 널리 알려진 루마니아의 블라드 체페슈가 14년 동안 포로로 갇혔던 곳이다. 동굴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입장료는 이전에는 5~6유로였는데 최근 물가가 크게 오르는 바람에 10유로로 올랐다. 안내책자가 없어 안내판을 따라 가면서 여러 방을 둘러보면 된다. 블라드 체페슈가 갇혔던 방은 동굴 마지막 부분이다. 괴기한 느낌을 주는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관이 놓인 곳이다.



타르녹 거리가 끝나고 디스 거리가 이어지는 곳에 조그마한 공원이 보인다. 공원 가운데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다. 동상의 이름은 ‘독립전쟁 기념물’이다.


헝가리는 1848~1849년 오스트리아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다. 헝가리 독립군은 처음에는 우세했지만 독립 열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질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제국을 지원하는 바람에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많은 독립투사가 도나우강변 세체니 다리 아래에서 처형당했다.


헝가리 독립군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밀려 부다성으로 쫓겨갔다. 이들은 연합군에 포위당한 채 1849년 5월 4~21일 고통스러운 항쟁을 이어갔다. 이를 ‘부다성 포위’라고 부른다. 독립군은 5월 21일 새벽 기습공격을 감행한 연합군을 막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이날 양측에서 총 1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다성에 독립전쟁 기념물 건립 운동이 시작된 것은 1871년이었다. 부다‧오부다 국가경비대협회가 당시 부다성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헝가리 국가경비대 대원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만든 것이었다. 제막식은 부다성 농성이 실패로 끝나고 54년 후인 1893년 5월 21일에 열렸다.


역사를 공부했으니 이제 동상을 자세히 살펴보자. 동상 높이는 5.3m다. 기단을 뺀 조각상만 따지면 4.2m다. 동상은 부다성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묘사한다. 그는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 국기를 들었다. 병사 옆에서는 날개 달린 천사가 축복을 내리듯 춤을 추며 승리의 화관을 머리에 얹는다. 


기단에는 ‘1849년 5월 21일, 자유 국가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또 곳곳에 ‘무명의 영웅에게’ ‘자유냐 죽음이냐’ ‘우리의 싸움은 옳은 자의 싸움이다. 우리의 승리는 조국의 승리다’라는 글이 새겨졌다.



헝가리인이든 외국인 관광객이든 독립전쟁 기념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순히 부다왕궁과 성마차슈대성당 사이를 오가는 데에만 관심을 둘 뿐 작은 공원의 작은 동상에 눈길을 돌리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이 중요할 뿐 거룩하고 웅장한 역사와 대의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독립전쟁 기념물을 지나면 디스 거리의 끝이 보인다. 이곳부터는 성마차슈대성당 주변은 물론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와 완벽하게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주택이나 상가 같은 건물은 없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이어진다. 성마차슈대성당 주변이 과거 귀족이나 평민이 살던 곳이었다면 이곳부터는 왕실 가족이나 오스트리아제국에서 보낸 총독 등이 살던 왕궁 구역이었다.


다스 거리의 끝에서 관광객의 앞을 가로막는 건물이 나타난다. 19세기 초에는 군사용 건물이었다가 19세기 중반 교회로 바뀌었던 곳이다. 그러다 19세기 후반기에는 군사용 건물로 다시 변신해 헝가리군 최고사령부가 들어갔다. 지금 이 건물은 매우 낡아 보인다. 원래 4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부다페스트로 쳐들어온 옛소련군이 맹폭격하는 바람에 위의 2개 층은 거의 전파돼 버린 탓이다. 건물 모퉁이에는 당시 폭격과 총격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이후 폐허 상태로 버려졌다가 2012년부터 헝가리 정부에 의해 재건됐다. 하지만 원래 4층이었던 건물은 2층으로 쪼그라들었다. 지금 이 건물은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사용된다.


다스 거리 끝에서 오른쪽 센트-기오르기 거리로 들어가면 곧바로 오른쪽에 공사 중인 큰 건물이 보인다. 건설회사인 ‘마자르 에피투’가 공사하는 건물 이름은 ‘요제프 대공 궁전’이다. 이 저택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헝가리 총독이던 요제프 카를 대공이 지은 저택이었다. 그는 18세기를 호령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증손자였다.


요제프 카를 대공이 1905년 세상을 떠나자 아들 요제프 아우구스트가 대공 자리를 물려받아 가족과 함께 요제프 대공 궁전에서 살았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스물한 살이던 1893년 11월 15일 세 살 아래이던 마리아 루이사 아우구스타와 결혼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황후 엘리자베트, 즉 시씨의 외손녀였고, 시씨의 둘째 딸인 기젤라의 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옛소련군이 부다페스트로 진격하자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궁전을 떠나 서유럽으로 탈출했다. 그이 가족은 모두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헝가리로 돌아갈 수 있었던 가족은 요제프 프란츠의 막내아들인 미하일리 합스부르크-로타린기아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자녀뿐이었다. 


무너진 궁전을 재건하는 사업은 2년 전 체코 전국의 성과 궁전을 재건하는 넴제티 하우즈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새 궁전이 완성되면 헝가리 대법원 청사로 사용될 예정이다. 공사는 2021년 7월 시작됐고 기본 골격은 완성됐지만 언제 최종 준공되지는 아직 미정이다.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는 만큼 사소한 부분 하나라도 신경을 써야 해서 공사를 서두를 수가 없다.



요제프 대공 궁전 반대편, 페스트와 도나우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쪽에는 두 개의 아름다운 건물이 서 있다. 오른쪽 건물은 헝가리 대통령 집무실 겸 관사인 산도르 궁전이고 왼쪽은 헝가리 총리 집무실 겸 관사인 옛 카르멜라이트 수도원이다. 대통령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총리가 들어간 것은 2019년이었다.


산도르 궁전은 19세기 초 기괴한 짓을 많이 저지르기로 유명했던 산도르 가문이 지은 건물이다. 특히 ‘악마의 기수’라고 불린 산도르 모리치 백작의 악명이 가장 높았다. 당시 유럽에서 최고 기수로 손꼽혔던 그는 말을 타고 부다지구의 여러 집 지붕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페스트 시내에 갔다가 마차 때문에 길이 막히자 말을 타고 마차를 뛰어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산도르 궁전은 19세기에는 오스트리아에서 파견한 총독의 관사로 사용됐다. 오스트리아가 자치권을 인정하던 헝가리에 총독을 보낸 것은 독립운동이었던 헝가리혁명을 유혈 진압한 이후였다. 따라서 산도르 궁전은 헝가리인에게는 치욕을 곱씹게 하는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기 황후 엘리자베트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해 헝가리 자치정부가 되살아난 뒤 산도르 궁전은 정부 수반인 총리 관저로 바뀌었다. 이곳에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엘리자베트의 ‘정신적 연인’으로 소문이 난 총리 안드라시 귤라였다.  


산도르 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큰 피해를 입었다가 나중에 복원돼 박물관으로 사용됐다. 현재 헝가리 1인자인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1998년 권력을 잡은 뒤 산도르 궁전을 다시 총리 관저로 되돌렸다. 2002년에는 헝가리 국회 결의에 따라 헝가리 대통령 관저로 바뀌었다. 


헝가리 총리 관저인 옛 카멜라이트수도원은 18세기 초엽에 건설됐다. 카멜라이트수도회가 해산된 뒤 18세기에는 카지노, 볼링장으로 사용됐다. 나중에는 국립극장, 민속극장 등 공연시설로 이용되다 오르반 총리가 총리 관저로 사용하겠다고 밝혀 용도가 바뀌었다.



산도르 궁전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부다왕궁이 나온다. 궁전과 왕궁 사이에는 온실 같은 시설이 있는데, 부다지구 아래쪽 클라크아담광장으로 연결되는 푸니쿨라가 다니는 정류장이다. 푸니쿨라 운행거리는 매우 짧아서 겨우 1~2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기념으로 한 번 타보거나, 너무 많이 걸어 힘들어서 체력을 아끼려고 타본다면 모를까 교통수단으로서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


재미있는 사실은 푸니쿨라를 만든 사람이 세체니 다리를 만든 세체니 이슈트반의 아들인 세체니 외된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강에 막혀 부다와 페스트를 오가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려고 다리를 만들었고, 아들은 부다로 올라가기 힘든 현실을 깨뜨리려고 푸니쿨라를 만든 셈이다. 



푸니쿨라 반대편에는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유적이 나타난다. 땅위 부분은 아예 사라져 없고, 땅 아래 부분만 남았다. 이곳은 ‘부다성 유적 발굴지’다. 대부분 관광객은 부다왕궁을 보고 ‘이곳이 예전부터 있었던 왕궁이구나’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래 부다왕궁은 지금 폐허가 된 유적 자리에 있었다.


자, 이제 부다지구의 하이라이트인 부다왕궁으로 들어갈 차례다. 왕궁 출입구에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날 준비를 하고 있다. 독수리는 헝가리 신화에 나오는 신의 메신저인데, 이름은 투룰이다. 


마자르족이 지도자 아르파드의 영도하에 스키타이를 떠나 새로운 영토를 찾으려고 나섰을 때 칼을 입에 문 독수리가 나타나 길을 안내했다. 아르파드는 투룰이 인도한 도나우강 주변으로 부족을 이끌고 가 896년 나라를 세웠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부다페스트였다. 



투룰은 이후 헝가리의 국가적 상징이 됐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헝가리 왕궁의 문장도 투룰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헝가리군, 테러방지센터 문장에도 투룰이 쓰인다. 이런 문장뿐 아니라 부다페스트의 겔레르트 언덕과 21, 22, 24지구 등 헝가리 어디에 가든지 영토를 지키는 모습의 투룰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다왕궁은 헝가리어로는 부다바리 팔로타라고 불린다. 영어 ‘Buda Palace’의 헝가리어다. 부다성 전체로 보면 꽤 넓은 지역이지만 부다왕궁만 놓고 보면 그렇게 넓지도, 크지도 않다. 빈의 쇤브룬 궁전, 뮌헨의 님펜부르크 궁전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사실 지금 왕궁은 과거에 존재했던 왕궁과 비교하면 매우 축소된 것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역사를 살펴봐야 알 수 있다.



부다성과 부다왕궁은 13세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1243년 몽골의 침략으로 곤욕을 치른 헝가리의 벨라 4세 국왕은 재침을 두려워하다 성을 쌓기로 했다. 몽골군은 평지에서 맞붙는 전투에는 능하지만, 돌로 만든 튼튼한 성에서 농성하는 상대는 쉽게 공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언덕인 부다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쌓았다. 부다뿐 아니라 도나우강을 중심으로 전국에 돌 성 100개를 건설하게 했다. 몽골군은 1284년 헝가리로 쳐들어갔지만 벨라 4세의 생각대로 부다성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이듬해 물러났다.


여러 차례 외적의 침략을 잘 막아주던 부다성은 17세기에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부다페스트를 포함해 헝가리 주요 지역은 100년 이상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유럽 영토에 눌러앉은 이슬람군을 몰아내기 위해 기독교 연합군이 결성돼 부다페스트로 몰려갔다. 오스만투르크는 부다성에 올라가 두 달 가까이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부다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부다왕궁은 무기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사실상 폐허가 되고 말았다.



새 왕궁은 18세기 초에 재건됐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계승전쟁 때 도와준 헝가리에 진 빚을 갚겠다며 왕궁 건설 자금을 낸 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한 19세기에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벌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건설한 왕궁은 배로 커졌다. 왕궁 전면은 도나우강을 바라보도록 수정됐고, 중앙에는 신바로크 양식 돔이 설치됐다. 오늘날 부다왕궁의 모습은 이때 조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헝가리는 물론 합스부르크 왕실의 재정도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다왕궁을 옛날 모습 그대로 재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헝가리 정부는 ‘넴제티 하우즈만 프로그램’이라는 계획에 따라 부다왕궁 복원 공사를 진행 중이다. 요제프 대공 궁전을 재건하는 것과 똑같은 프로그램의 하나다. 이 프로그램은 10년 동안 체코 전국의 성과 궁전 30곳을 재건하는 사업이다. 헝가리 유적을 재건함으로써 국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외국인 관광객을 더 끌어들여 관광수입을 늘리자는 게 목표다.


2022년 10월에 갔을 때와 지금의 공사 진척 상황은 상당히 다를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를 볼 수 있고, 어디까지를 볼 수 없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이전에 가 봤을 때를 기준으로 왕궁을 소개하려고 한다.



공사장으로 변한 부다왕궁을 내려다보면서 왕궁 출입구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가장 먼저 ‘낚시하는 소년’ 조각상이 등장한다. 1900년에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렇게 오래된 조각은 아니다. 


부다성 정원 한복판에는 도나우강과 페스트지구를 내려다보는 장군의 기마상이 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헝가리인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에 벨베데레 궁전을 건설한 사보이의 오이겐 공작 기마상이다. 왜 오스트리아 장군의 기마상이 여기에 있을까?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부다페스트를 해방시킨 연합군 사령관이 바로 그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마상을 세운 것이다.



사실 오이겐 기마상은 헝가리로서는 고마운 인물의 동상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나라의 힘이 약해 처음에는 오스만투르크에, 나중에는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 역사를 보여주는 동상이다. 


부다왕궁은 지금 국립세체니도서관, 헝가리국립미술관, 부다페스트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누구라도 입장료만 내면 세 곳의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다만 도서관의 경우 계절에 따라, 요일에 따라 개방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미리 잘 알아보고 가야 한다.



부다왕궁이 많은 관광객을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어부의 성채처럼 아름다운 파노라마 전망을 볼 수 있어서다. 어부의 성채에서는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전망을 볼 수 있다면 왕궁에서는 세체니 다리와 국회의사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두 곳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야경 사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한 컷이 아닐 수 없기에 카메라나 휴대폰을 손에 들고 이곳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부다왕궁에서는 에르지벳 다리와 자유의 다리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어부의 성채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부다왕궁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얼마나 시원하고 멋졌던지 19세기 황후 엘리자베트도 이곳을 매우 좋아했다. 그녀는 특히 정원과 정원에서 바라보는 도나우강의 시원한 경치, 강 건너편 페스트 지구의 풍경을 좋아했다. 이곳은 부다페스트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니 그녀라고 반하지 않을 까닭은 없었다. 그녀는 망원경으로 성 아래 도시의 풍경을 둘러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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