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
친할머니는 대한민국 땅 끝에서도 배를 타고 한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섬마을에 살고 계신다. 친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은 모두가 비상이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집을 나서야만 차 막힘 없이 첫 배시간에 맞춰 항구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 부모님이 할머니를 뵈러 가신다고 한다.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이전에 써 둔 그곳의 이야기를 소환해본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가족이 선발대, 후발대로 나뉘어 할머니 댁으로 출발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던 엄마와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하루 일찍 할머니 댁으로 출발했다. 밤을 꼬박 새워 온 아빠와 남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쏟아지는 잠을 청하러 방으로 사라졌다. 곧 주일 예배가 시작될 시간.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엄마와 함께 편히 교회로 모시고 다녀오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남편의 차 키를 인수받고 교회로 향했다.
예배가 끝나고, 누구보다 빨리 교회문을 나섰다. 걸음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위해 미리 교회 문 앞에 차를 대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교회 건물 앞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언덕길이라 그런지 왠지 차가 뒤로 밀리는 것 같았다. 한번 더 힘차게 밟았다. 앞바퀴에 장애물이 걸려있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미련하게 가속페달을 한번 더 세게 밟았다.
난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 내 인생은 언제나 삐딱선.
덜커덩. 가속페달을 밟고 있던 그 순간, 자동차 앞에서 무언가가 뜯어져 나갔다. 앞범퍼였다. 너무나 쉽게, 살포시 얹어 놓은 종잇장이 바람에 날아가듯이, 그렇게 맥없이 범퍼가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장애물의 정체는 언덕 오른쪽에 곱게 꾸며놓은 화단을 둘러 놓은 돌담이었다.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나오던 우리 가족과 목사님 내외의 눈에 어이없는 나의 돌담 추돌 사고가 포착됐다.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차를 버려두고 도망가고 싶었다. 놀란 할머니와 엄마의 목청이 높아졌다. 엄마, 조금만 조용히 말해줄래요. 사람들이 다 여기만 쳐다보잖아요.
그때였다. 흰색 와이셔츠와 각 잡힌 양복을 차려입고 계신 남자 성도님들이 하나, 둘 양복 재킷을 벗어 내려놓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검게 그을린 피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맞다. 여기는 섬이지. 이 분들은 모두 섬사람들이시다. 바다에서 거친 풍랑을 맞으며 정직하게 맨손으로 삶을 일구어오신 분들. 됐다.
그들은 진품명품의 감정사들처럼 삼삼오오 앞범퍼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드디어 감정이 끝나고 어벤저스의 활약이 시작됐다. 뭐가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것 좀 찾아줄래? 이거면 되겠다. 순식간에 철사와 노끈이 모였다. 범퍼가 뜯긴 자리에 아무렇게나 뜯어져 있는 전선과 전등이 제 자리를 잡았다. 하나, 둘! 앞범퍼를 차체 위에 얹고 철사와 노끈으로 그 둘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순식간이었다.
“출발! 서울까지 끄떡없겠어!” 유난히 더 까맣게 그을린 한 남자 성도님께서 차를 툭툭 치며 말씀하셨다.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밝게 웃음을 지으시면서. 세상에, 아빠의 고향, 아빠와 함께 어릴 적 바닷속을 헤엄치고 다녔을 아빠의 친구들, 이 섬을 향한 경외심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다행히 앞범퍼는 서울까지 안전히 제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주보에 적혀있던 교회의 계좌번호로 소정의 금액을 헌금했다. 목사님, 돌담을 고치는데 써 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의 돌담 추돌 사고 소식이 회자될 때마다 우리는 한바탕 웃는다. 그리고 떠올린다. 어벤저스들의 해같은 표정과 바다같은 눈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