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누굴 만나서 데이트를 해야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 엄마는 스케줄이 연예인 못지않다. 우리를 키우실 때 못 나갔던 한을 푸는 듯 자기 계발, 사람들과의 만남에 열성적이시다. 황혼육아를 하시긴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스케줄 중의 아주 일부일 뿐이다. 그래도 이 독박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엄마가 2,3시간 정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자꾸만 "이제 나가"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홀린 듯이 책과 필사노트를 가방에 욱여넣고 우선은 나온다. 예고 없이 자꾸만 찾아오는 "이제 나가"의 시간 때문에 나는 어디로 갈지 전혀 계획이 없다. 우선은 차에 타서 운전대를 잡는다.
처음엔, 갈 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동으로 과거를 회상한다. 친구와 놀러 다니고, 연애할 때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저기 걸어 다니던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혼자 있는 시간에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머릿속으로 나는 수다쟁이가 된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떠오르는 대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나와의 데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나를 사랑해 주고 알아가기로 했다.
어제는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갔다. 예전에 아이의 하원버스를 기다리며 아파트로 조각난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싫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주차를 하고, 이어폰을 끼고 걸었다. 차가운 하늘과 솜사탕을 길게 뜯어놓은 것 같은 구름, 멀리 상록수가 빽빽하게 심어진 산을 보았다. 감정은 넘치는데 그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나를 가라앉혔다. 해가 지는 풍경은 슬펐고, 말라버린 풀들은 쓸쓸했다.
사람들과 있을 때, 밝고 원만한 성격의 페르소나를 던져버리고 내 안의 심연과 마주하고 온 시간이 좋았는지 별로였는지 모르겠다. 친구와 통화하며 1시간 넘게 전화기를 붙잡고 한 바탕 눈물을 쏟아낸 후 시원함은 없었지만 방 한구석 먼지 구덩이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다. 그리고 이 감정을 글로 정리하니 그 먼지 구덩이를 손으로 집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것 같다.
다음에는 인터넷에 아직도 하루에도 몇 개씩 보이는 이혼 전의 힘든 나의 모습이 보이는 사람들(그러나 이혼을 생각하지 못하는)에 대한 나의 생각을 써봐야겠다. 그리고 요즘 브런치를 시작한 뒤로 생각이 너무 많이 떠오르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글로 정리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