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에 택시에 지갑을 두고 내렸다
부끄럽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쓴다. 회사 행사로 퇴근이 늦었던 날, 혼자 술을 좀 마셨다. 좀 마신 게 아니긴 했지만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니 생략하자. 참 이상한 날이었다. 회사에서 술집까지 타다를 타고, 술집에서 집까지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들이 유독 말을 많이 걸었던 날.
스스로 좀 의외라고 생각하는 기질 하나가 있는데, 취했거나 피곤해서 멘탈을 좀 놓은 상태가 되면 아저씨들의 대화를 잘 받아 주는 능력이 생긴다는 거다. “내가 아들 둘을 미국 대학 보냈어요. 이번에 어디 취직해서 이제 연봉이 얼마래요”하시면 “아유, 너무 고생하셨겠다. 이제 호강하실 일만 남았네요!” 같은 멘트를 잘도 하게 된다.
택시 기사님이 좀 재미있는 분이기는 했다. 술을 좀 깨려고 사탕을 오독오독 깨먹고 있으니 “뭘 그렇게 맛있게 먹냐”며 좀 달라고 하셔서 (뭐지 이건 ‘한입만’ 찬스인가 생각하면서) 하나를 나누어 드렸다.
리액션이 좋아선지 아내와 사별한 지 좀 됐는데 이제 애들도 다 컸으니 여자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말까지 들었고 “그렇죠. 힘들 때 말할 사람 하나 옆에 있으면 든든하죠”라고 받았다. 사실 딱히 진심이 담긴 말은 아니었다. 그냥 기분 좋으시라고 한 얘기였는데 어쩐지 그 순간의 공기는 좀 따뜻해진 것 같았다.
대화의 절반은 최근에 취직을 했다는 아들에 관한 거였다. “아드님이 아버지가 고생하는 거 보고 열심히 하셨나 보다. 좋네요. 근데요, 기사님. 저는 조금 더 놀고 싶은데 어떡하죠?”하고 깔깔깔 웃으며 내렸다. 술도 먹고 누군가의 기분을 살짝 좋게 해주기까지 해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지갑이 없어진 것을 깨닫기 전까지.
법인 카드까지 들어 있던 터라 하루 종일 전전긍긍했는데, 다행히 택시에 있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갑이 있어요”라고 알려 주는 기사님 말씀이 이랬다.
“좋은 대화를 나눠서 기억하고 있어요. 명함이 있기는 한데, 혹시 다른 사람 거면 실례될까 봐 기다리고 있었어요. 회사로 연락 올까 봐 동료들한테 얘기도 해줬어. (아, 감사합니다. 걱정했어요!) 아이고, 감사는 무슨.”
지난 번에 다른 택시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수소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이게 다 내가 반쯤 빈말로 주고받은 대화 덕이었다. 어쩐지 노력하지 않고 뭔가 얻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원래 진심 같은 건 아무도 모르는 것일지도. 상대가 얼마나 마음에서 우러난 말을 하고 있는지는 측정할 수도 없거니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말은 딱 표현한 만큼만 이해된다. (2019.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