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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성 Mar 03. 2022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을 보고

게리 로스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

해피 헝거 게임!

확률의 신이 여러분 편이기를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아들의 입학식 전날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일 ㅇㅇ이 입학식이네. 이제부터 험난한 세상의 경쟁의 시작에 들어가는 것 같아 안쓰럽지만 할아버지는 우리 ㅇㅇ이를 믿는다."


난 이 문자를 아들에게 읽어주지 않았다. 그저 "할아버지가 네가 잘할 거라고 믿으신대."라고 알려주었다. 

경쟁이 당연한 세상... 우린 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경쟁이 먼저 떠오를까?

아이들의 경쟁... 이 경쟁에 대한 영화가 있다. 바로 헝거 게임... 난 오늘 또 이 영화를 보았다.

전 세계에서 엄청난 흥행을 했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그리 흥행하지 못했다. 한국 관객 동원 60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60만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 내심 자랑스럽다.

난 이 영화를 볼 때 늘 같은 감정이 든다. 소름, 분노 그리고 미안함. 한국 관객 동원 60만이라는 저조 하다면 저조한 성적을 거뒀지만 난 이 영화는 사실 한국의 상황과 상당히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의 이 말이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다. 그렇지만 난 나의 말을 하고 싶다.

사태에 대한 관찰과 인식은 각기 다른 측면을 바라보기에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난 미하엘 바흐친에게 그렇게 배웠다. 그렇기에 내가 본 세상이 남들과 다르다 할지라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정상과 비정상이 전복되는 카니발 축제의 장과 같이. 

이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국가이다. 판엠이라는 국가가 그 배경이다. 그리고 이 국가는 12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2개의 구역은 사실상 계급 질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각 구역에서 남자 미성년자 한 명과 여자 미성년자 한 명을 선발하여 살인 게임 혹은 서바이벌 게임인 헝거 게임에 출전시킨다.

주인공은 12구역 즉, 가장 하층민 구역 출신의 여자 아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펼치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분명히 이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국가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실과 붙어있다. 1에서 12번 구역까지의 아이들은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각 구역의 특징이다. 1번 구역의 아이들은 헝거 게임을 위해

일명 "사교육"을 받고 헝거 게임의 챔프가 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는다. 그 훈련을 통해 아이들은

타인의 생명을 짓밟는 것에 아무런 죄책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교육받은 대로 살상한다. 반면, 12구역의 아이들은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그런 교육 따위는 사치를 넘어선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게임이 누구나 챔프가 될 수 있는 게임이라 말한다.

마치 우리의 수능 시험을 보는 것과 같다. 수능... 그 이름만으로도 엄숙해지는 일생일대의 대 사건으로 여겨지는 인생의 한 판 승부! 

몇 해 전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보면 이런 부분은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 드라마가 던져준 메시지와 달리 입시 코디에 대한 관심과 시장이 확장된 것처럼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이 헝거 게임 자체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다들 잔혹하고 슬픈 이벤트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꼭 필요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이벤트에서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이길 수 있을까? 를 생각하지, 이 말도 안 되는 이벤트를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도 유사한 듯하다. 조국 장관의 자녀들의 사건은 수능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식에게는 제도에서 승리자가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잘 드러난 슬픈 사건이라 생각이 든다. 

헝거게임은 잔인하리 만큼 입시에 대해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입시, 수능은 공정한 싸움이 아니다. 다들 알고 있다. 몇백, 몇천이나 하는 돈을 퍼붓는 1구역의 아이들과 같은 시험을 보는 것이 어떻게 공정한가?

광부의 아이로 태어나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다 죽음 아버지를 둔 아이가 1구역의 아이들과 경쟁하고 동일한 조건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이 공정한 게임이라 할 수 있는가? 법원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부모가 유력자이기에 대학 실험실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사실 난 대학에서 고등학생에게 렙실 시설을 사용해주는 경우를 정말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력자 집안의 아이들은 가능한 모양이다. 

또한 학술지에 이름 한 줄 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나로선 그리고 지금도 그 한 줄의 스펙을 만들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나로선 우리 아이는 열심히 실험에 참여했다고 말하는 기득권층의 발언에 절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그녀의 아버지가 유명 대학 교수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과연 그 실험에 참여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같은 시험을 본다고 해서 그것을 공정하다고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만약의 그의 어머니가 유력 정치인이 아니었다면 실험실 이용이 가능은 했을까? 

그것은 공정이란 이름의 허상이다. 이 불공정한 게임이 입시라는 이름으로, 수능이란 이름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맹점이다. 

영화에서 헝거 게임에 출전하는 아이들에게 응원을 하고 그들을 치켜주는 모습, 좋은 음식을 제공하고 그들이 다른 것이 아닌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가 고3을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이 구조 안에서 아이들을 위한 최선이라 자위하며... 수능은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마치 

해피 헝거 게임!

확률의 신이 여러분 편이기를

말하는 스노우 대통령의 연설을 연상시킨다. 헝거 게임에 참여하는 아이들에게 잠깐은 동일한 교육을 한다.

나는 이것이 공교육의 허상으로 보인다. 공교육을 하고 있으니 우리는 평등한 교육을 제공했다. 네가 실패한 것은 너의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해서다.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

불공정을 감추기 위한 하이퍼 리얼리티가 현재의 공교육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지만 하이퍼 리얼리티 뒤에 숨어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날이 갈수록 잔인해지는 소년범죄는 현실의 헝거게임이 배설해 놓은 쓰레기가 아닐까? 이 불공정에 대해 우리는 언제까지 침묵할 것인가?

나는 헝거게임을 볼 때 이러한 현실과 물음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고 다음 세대에 미안해진다. 나의 침묵과

나의 무기력함과 굴종에 대해  반성하게 만드는 영화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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