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이라는 착각_01

진정성이라는 용어

by 이규근

들어가며 - 진정성이라는 용어


우리가 흔히 욕망하는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진정성’이다. 진정성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것과, 진정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대체로 ‘진정성’의 정확한 실체는 모르는 듯하나 ‘진정성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대강 알고 있으며, ‘진정성’이 뭐든 간에 그것을 우리가 원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진정성은 ‘그게 아닌 것이 무엇인가?’ 를 짚어내 그 반대로 이해하는 것이 최적인 용어이다. 또한, 진정성이 뭐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확실하게 원한다. 결국, 진정성을 논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문제의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이해해야 하며 그것과 대조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정한 것? 물론 좋다. 그러나 무엇과 대조해서 진정하다는 것인가?


현대문화의 비(非)-진정성

2003년 영국 언론인 데이비드 보일은 실재가 아닌 가상, 진짜가 아닌 여과된 것을 선호하는 현상을 가르켜 현대문화의 비진정성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진단한다. “홍보전문가, 광고업자, 가상의 재화와 용역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는 참되지 않은 조잡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것들을 억지로 떠안기려고 작정한 글로벌 경제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짜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여기에 반발해 ‘꾸며지고 매개되고 홍보되는’ 세상을 대체할 대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혁명은 하나의 단어를 둘러싸고 구체화된다. 바로 ‘진정성’이다. 진정성개념 속에는 윤리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 솔직한 것, 단순한 것, 꾸밈없는 것, 지속가능한 것, 아름다운 것, 뿌리깊은 것, 인간적인 것 등의 의미가 담겨있다. 선진국의 제도적 구조와 문화규범을 비판하던 20세기 중반의 대중사회 비평과는 달리, 진정성에 대한 욕망은 250년 이상 진행된 서구의 발전 과정 전반을 아우르는 근대성 그 자체를 문제삼는다.


진정성이 갖는 도덕적인 성격

근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진정성이 부상하는 현상에 관한 중대한 문헌으로 문학비평가 라이오넬 트릴링이 1972년에 발표한 [성실성과 진정성](Sincerity and Authenticity)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진정성이라는 용어가 미술사와 박물관학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이 분야에서 진정성을 따지는 것은 작품의 역사와 기원을 묻는 것이다. 즉, 겉으로 보이는 모습처럼 정말 명나라 자기인지, 정말 로스코의 그림인지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것이다. 진품으로 확인되면, 그 작품이 감탄과 숭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거나 지불한 값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유사한 예로, 우리가 고대 종교 유물로 보이는 물건의 진정성을 묻는 것은, 그게 실제로 고대의 신성한 의식에서 사용된 물건인지 아니면 오로지 관광객에게 팔려는 목적으로 생산된 상품인지의 여부를 알고싶은 것이다.


트릴링의 중요한 공로는 사물의 외관과 실재를 구분하는 일이 결국에는 지극히 도덕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그렇게 보임’과 ‘정말로 그러함’ 사이의 구별, 즉 외양과 실재의 구분은 수세기 동안 철학자들의 화두였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인식론적 구분이라고 부른다. 또한, [햄릿]에서 레어티스가 파리로 떠날 준비를 하는 장면에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그러면 마치 낮에 이어 밤이 오듯 너는 어느 누구에게도 거짓될 수 없다.”

그는 스스로에게 충실한 것이야 말로 도덕의 필수요건임을 깨달으며 “자기 초월의 순간을 경험”한 것 이라고 말한다.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구절이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을 강력히 지배하는 표현으로 우리 언어 속에 정착한 사실은 트릴링의 해석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내면과 외면의 일관성을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거짓, 불성실, 위선을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도덕 위반으로 여긴다.


실재성과 개인의 실존에 대한 불안감

“진정성이 우리 시대 도덕 언어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처한 상태의 특수성, 즉 실재성과 개인의 실존에 대한 불안감을 시사한다”고 트릴잉은 주장한다. 여기서 그(트릴링)는 진정성 담론 전반에 성서적 분위기가 스며 있다고 강조한다. 태초에 인간은 화합으로 충만한 진정성 본연의 상태에 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청난 불화가 발생해 우리는 자연과 사회, 심지어 우리 자신으로 부터 유리되었다. 이후 우리는 타락 상태에서 살았고,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중요한 정신적 목표는 본래의 진정한 조화 상태로 회귀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유리 상태의 원인은 다름 아닌 근대의 탄생이다. 세속주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등장이 특징인 근대는 의미 있는 인간적 실존과 관련된 그 무엇인가를 상실하게 만든 주범이다. 옛날에는 종교, 특히 유일신 종교가 선, 진실, 가치의 객관적이고 영구적인 기준으로 작동했고, 바로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삶이 의미있는 삶이라는 생각으로 사회(실은 문명 전체)를 구성했다. 종교, 귀족제, 공동체, 국가주의 같은 가치의 전통적 원천들이 과학기술,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용매에 전부 녹아버린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 바로 진정성 찾기다. 조화와 환상이 깨졌을 뿐 아니라 옛날보다 평등해지고 범세계적, 개인주의적이 된 이 세계에 좀 더 수용되기 쉬운 개념을 찾아 신을 대체하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다양한 길로 접어든다. 자기 안의 창의력과 감성을 숭배하고, 전근대에 대한 페티시즘과 이국 문화의 전근대성을 찬양한다. 남들이 안 하는 방식으로 소비하는가 하면, 지역 공동체와 지역 경제 조직을 꾸리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식 소비와 향락의 천박성에 대한 적대감이 극심하다. 분리와 거리, 화합의 상실, 일체성과 조화라는 성서적 분위기를 풍기는 진정성의 언어는 우리 도덕관념의 확고한 일부여서 우리는 그게 본질적으로 종교적 사고방식이라는 점조차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나 노동, 교외생활, 기술이 초래하는 인간소외 현상을 자연스레 논하는 것도 ‘우리는 타락했다’는 관념의 출처인 성경의 언어와 관련있다.


개인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진정성 추구

진정성추구는 상실된 화합을 복구하려는 시도다. 과거에 종교의식, 기도, 성찬식에서 얻었던 것을 요즘은 [오프라의 북클럽] 같은 방송이 제공하는 심리 분석, 자기계발, 감성, 감정, 향수, 여피 소비주의가 적당히 뒤섞인 지극히 현대적인 형태의 영성(spirituality)으로 충당한다. 또는 쇠고기, 닭고기, 채소, 면직물, 초콜릿, 화장지, 드라이클리닝 할 것 없이 뭐든 ‘유기농’에 집착하는 것 역시 진정성 추구의 한 방편이 됐다. 그와 유사하게 지역 농민, 지역 책방, 지역 에너지 같은 지역 경제에 대한 관심 증가도, 낭비적이고 혼란스러운 대량생산 소비주의보다 소규모 공동체의 전일성(holism)이 훨씬 소중하고 보람된 것이라는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장경제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혐오가 존재한다. 행위는 본질적으로 인간소외를 일으킨다는 신념때문이다. 어떤 형태든지 간에 진정성 찾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자리매김했으며, 의미 있는 삶과 자기 실현에 대한 개인적 욕구뿐 아니라 지속 가능하고 평등하고 환경친화적인 진보 경제,진보 정치에 대한 요청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진정성은 그런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진정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 이 책의 대주제이다. 적어도 삶의 의미 찾기에 필요한 대대적인 방편으로서의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성은 세상을 논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우리가 타인,세계,사물과 맺는 관계에 대해 판단하고 주장하고 선호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 주장, 선호는 어떤 실체적 속성을 가려내지 않는다. 진정성 추구가 현시점에 특별히 시급하고 타당해 보여도 그 유래를 더듬어 보면 최초로 진정성 투쟁의 전선이 그어졌던 18세기 후반 이래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점을 드러내는 것도 이 책의 목표다. 우려되는 점은 진정성 이상을 추구하는 우리의 방식이 오늘날 오히려 ‘비진정성’을 초래하는 강력한 원인이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진정한 나, 진정한 삶, 진정한 경험의 의미와 관련해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 핵심에는 자기 실현과 지기 발견을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주의가 자리한다. 문제는 거기에 반사회적, 비순응적, 경쟁적 속성이 내재한다는 점이다. ‘너만의 어떤 것을 하라’고 권하는 히피 버전의 진정성 추구는 남들은 하지 않는 행동, 튀는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순응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대중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쟁을 유발한다. 잘 살펴보면, 로프트에서 살기, 생태관광, 슬로푸드 운동같은 소위 ‘진정성 있는’ 생활양식들에서도 위장된 형태의 지위 획득 행위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는 타자에게 분개의 감정을 일으킨다.


경쟁과 이기주의, 속이 텅 빈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진실한 인간관계와 참된 공동체가 사라진 천박한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우려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불편한 모순을 야기한다. 천박성과 거짓됨을 자인하는 사람도 없고, 인공적인 대량생산품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그렇게 진정성을 갈망한다는데 어째서 세상은 날마다 점점 더 진정성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일까? 진정성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욕구가 문제를 도리어 악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근대와 화해하고, 지위 추구, 향수병, 반동정치 없는 의미 있는 삶을 허락하는 개인주의를 찾아 전진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어떻게 지금에 도달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근대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