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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Dec 22. 2023

산타 남편을 둔 아내의 크리스마스

아무리 봐도 산타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만국 공통의 영역 같다. 종소리가 울리고 트리 불빛이 반짝이는 그날이 다가올수록 우리 집에 상주하고 있는 산타 남편은 분주하다.


특별한 종교가 없지만,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남편은 가족들의 선물을 챙긴다. 가족의 의미는 우리 딸들과 나를 포함한 소박한 4 식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외동이기 때문에 다행히 조카가 없는 친정을 제외하고 시댁에 있는 7명의 조카들의 선물을 8년 동안 챙겨 왔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란 들려오는 캐럴에 어깨를 들썩이는 정도였으며, 친구들과 소소하게 작은 선물을 나누고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빨간 날이었다. 친정 부모님에게도 크리스마스는 출근을 해야 하는 많은 날 중 하나였을 뿐이다.


결혼하고 첫 크리스마스에 모든 시댁 식구가 시누집으로 모였다.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아기부터 6살 큰 조카까지 자기 몸집만 한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고 기뻐했다. 크리스마스는 울지 않고 기다린 조카들에게 내리는 선물 같은 날이었다. 그런데 나도 착한 일을 많이 했었나?


"자, 이리 와서 선물 받아야지"


시아버지가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주셨다. 시어머니, 시누, 동서 그리고 나는 깜짝 서프라이즈에 당황해서 허겁지겁 선물을 풀어봤다. 장갑이었다. 백화점에서 보던 깔끔하고 세련된 장갑을 시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았다. 백화점을 잘 가지도 않지만 눈으로만 쳐다보던 장갑이 손에 들린 순간 상기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손에 넣으니 안감에 있는 털이 손을 따뜻하게 감싸줘서 한겨울 추위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중 어떤 것보다 시아버지에게 받았던 그 순간이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고 크리스마스에 제대로 받아 본 첫 선물이었다.


아이들이 있다 보니 크리스마스는 조카들과 함께 보내는 시댁의 가족 행사가 되었다. 만삭이라 우리 집에 아기는 태어나기 전이었지만 남편은 조카들의 선물을 사주고 싶어 했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많이 받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이입한 건 아닌지,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조카들에게 선물을 해줄 수 있냐고 나에게 물었다.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간절하게 물어보던 남편은 우습게도 어린이날에도 조카들의 선물을 매년 챙겨 오고 있다.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이 반년의 시간을 두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조카들의 선물을 고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성별과 나이를 고려하여 취향에 맞는 선물을 그들의 부모님 모르게 준비해야 한다. 남편은 고르고 고른 것들을 집으로 배송시키면, 아무도 모르게 남몰래 선물을 포장해 준비하는 일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이제는 고등학생이 돼버린 조카에게도 소소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주고 있다. 아이패드를 사줄 것이 아니라면 안 해주는 게 낫지 않냐고 우회적인 만류의 소리도 해봤지만 형편에 맞게 소소한 기쁨을 나누고 있다.


나이를 먹더라도 산타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고가의 상품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너를 위해 곱게 포장한 상자가 두 손에 닿을 때 쌍방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 성냥팔이 소녀가 켠 성냥 속 풍경처럼 작은 행복이 되지 않을까. 흰 수염에 빨간 옷을 입지 않아도 크리스마스가 오면 깜짝 이벤트처럼 삼촌의 선물이 있다는 즐거움을 조카들이 간직했으면 한다.


2015년에 조카들을 위해 준비했던 선물들


하지만 올해는 7명의 조카와 두 딸을 넘어서 친정에도 메리크리스마스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에 출근을 하시게 뵐 수 없어 지난주, 미리 친정에 들렀다. 그런데 남편이 나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외할머니랑 막내삼촌 식구도 올 수 있으면 선물을 준비하는 게 어떨까?"


추위를 타는 할머니에게 조끼를 담배를 피우는 삼촌에는 향수를 손이 잘 트는 숙모에게는 핸드크림을 추천하는 남편의 섬세함에 놀랐다. 솔직히 조카들과 친정 부모님을 넘어서 할머니 삼촌까지 챙기려는 마음이 고마웠다. 물론 막내 삼촌이 시간이 되어 친정에서 만났을 때의 일이겠지만 마음을 써준 것 만으로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것 같은 따스함이 전달되었다.


다음날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에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아쉽게도 삼촌은 일이 있어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우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안도가 들었다. 안 그래도 친정 부모님 선물과 조카들의 선물 그리고 우리 아이들 선물까지 사기 위해 꽤 많은 지출이 발생한 상태였다. 선물 3개를 더 사는 게 가정 경제를 휘청거릴 만큼의 여파를 가지 오지는 않겠지만 촉박하게 남은 시간 동안 선물을 사야 하는 수고와 비용을 절감한 것을 생각하니 짧은 숨을 내쉰 것이다.


남편보다 한 살이 많은 막내 삼촌이지만 자녀들은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유초등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우리 집에 비하면 빠른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은 막내 삼촌이 신기할 뿐이다. 남편은 처남과 처제가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심심할 텐데 앞으로 크리스마스는 처가에서 다 같이 외할머니 하고 보내도 좋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크리스마스를 챙기지 않는 친정인데 남편의 제안이 솔깃했다. 연말연시에 한 해 동안의 감사했던 마음을 작은 선물로 표하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가지면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띵똥"


문자 메시지로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린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3주 전인데 남편이 주문한 선물들이 수북이 베란다에 쌓인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주섬주섬 선물들을 그러모아 각기 다른 포장한다. 핸드폰으로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 놓으면서 선물 받을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통장에서 빠져나간 돈들은 생각도 나지 않고 기뻐하는 모습만 떠오른다.


루돌프가 끄는 썰매 대신 차에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넣고 친정에 갔다. 건조해서 비염이 심해지는 것 같은 친정에 가습기를 선물하고 부모님의 피부를 촉촉하게 해 드릴 화장품도 드렸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친정에도 산타가 숨어있었다. 손녀들을 위한 장난감을 준비하신 아빠는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시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했다. 당황스러웠던 건 선물 포장을 본인이 뜯어서 주시려는 것을 간신히 말려서 아이들에게 줬다는 것이다.


"왜~선물은 뜯어야 제 맛이지"

"아빠~~ 선물은 본인이 뜯어야지요~~~"


아이들은 가지고 싶었던 선물을 받아서 기분이 한 껏 좋아졌다. 낮에 마을회관에서 술을 한 잔 걸치셔서 볼이 빨개지신 산타할아버지는 손녀들의 모습을 보더니 지갑을 여신다. 노란 종이 한 장씩을 주시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친정 엄마는 소리를 지른다.


"선물을 줬는데 돈을 왜 또 줘~~~~"

"선물은 선물이고 돈은 돈이지~~ 자~~~ 받아"


아이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라는 듯 기분이 하늘로 날아갔다.


"너희가 있으니 할아버지가 산타할아버지도 되어 보는구나"


산타가 된 할아버지, 아빠는 크리스마스 선물도 고맙지만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가족 간의 진한 시간을 마련해 준 것에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남편이 생각하는 크리스마스도 그런 것 같다. 크리스마스는 핑계다. 어린이날도 핑계다. 이유 있는 핑계를 대면서 평소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전하고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덕분에 매번 명정처럼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한 달 전에 포장 전문 기사가 되어 바쁘지만 이제는 전보다 더 즐거운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준비할 것 같다. 이번주 다가오는 시댁 식구들과의 크리스마스도 기대가 된다.


올해도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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