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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수 Dec 21. 2021

서른 비용 -김성민

Born in 1993.07.07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색을 하러 왔다. 이왕 하는거 티나게 밝은 갈색으로 결심했다. 기분전환도 하고, 새로운 머리 색에 맞춰 쇼핑 할 생각에 설렌다. 단골 미용실 원장님도 신경써서 예쁜 색으로 배합해주시겠다며 샴푸실로 안내하셨다. 잘 어울릴지, 너무 밝지는 않을지, 머리카락이 많이 상할 지 등 뻔한 대화를 나눴다. "너무 노랗지만 않게, 적당히 밝은 갈색으로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의자에 앉아, 염색이 끝나길 기다리며 거울을 본다.


사실 지금의 머리는, 특히나 색상은 만족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생각도 없을 염색하기는 19살 때 작성한 <20대에 하고 싶은 20가지 버킷리스트>를 29살의 내가 일명 <서른 비용>이라는 말로 실행하는 것이다. 서른 비용은 시발 비용에서 따와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시발 비용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일컫는 신조어(위키백과)라면, 서른 비용은 30대로의 시발(욕 말고 시발점)을 계기로 들어가는 비용이다. 아직 못 해본 것들을 도전하고 이것저것 플렉스 할 때 마음 편하게 붙이는 핑계인 것이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지만, 나는 29살이고, 20대 버킷리스트에는 염색하기가 있다.


곧 서른이라는 사실은 중압감보다는 프리패스 자격증 같았다. 부모님의 눈치가 보일 때, 할까말까 고민일 때, 갖고싶은 물건이 있을 때 등 넛지가 필요한 순간마다 요긴하게 등장하는 말이 바로 올 해가 마지막 20대라는 것이었다. 우리집은 외박은 커녕 귀가 시간이 늦으면 부모님께서 데리러 오시기에 암묵적인 통금도 존재한다. 때문에 친구들이랑 와인파티를 목적으로 호캉스를 다녀오겠다는 파격적인 포부를 외칠 때 "내일모래면 서른인데 친구들이랑 노는 것마저 허락을 받아야해?"라는 서른 비용은 암행어사의 마패가 따로 없었다.


서른 비용은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한동안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1월에는 처음으로 스튜디오에서 언니와 한복 사진도 찍어보았다. 2월에는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브랜드의 핸드백도 하나 질렀고, 그 다음 달이 바로 삼총사 호캉스였으며, 고가의 반지도 나에게 선물하고, 그 이후에는 멋진 골프채 세트도 구매했다. 그 외에도 가족들 몰래 연차를 내고 친구와 에버랜드에 다녀오는 것 등의 소소한 일탈도 도와주었다. 이렇게 계속 승승장구하며 '서른,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인걸?' 할 때 쯤 20대 버킷리스트가 생각났고, 그 길로 바로 염색을 하러 온 것이다.



처음이기에 더욱 특별할 줄 알았던 염색은 뜻하지 않게 전혀 예상치 못한 실망감으로 돌아왔다. 기장 추가에 머리카락 손상 보호로 추가한 마스크 트리트먼트, 몇시간을 기다린 나의 서른 비용의 결과가 무려 빨간 머리인 것이다. 미용실을 방문하며 상상한 색상은 옅은 애쉬 브라운이었지만, 원장님이 배합해주신 컬러는 노란 색은 싫다는 나의 취향을 반영한 초코 브라운.  피부색, 색조 화장 (특히나 눈썹), 입고 있는 옷, 가방과 모든 아이템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머리카락은 얼굴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 했고, 영화 블랙 위도우 나타샤의 빨간 머리가 생각났으며, 급기야 월요일에는 급한대로 모자를 쓰고 출근을 하였다.


바로 그 다음 주말에 미용실을 방문해 한단계 톤다운 염색을 하였다. 인터넷에 머리카락 빨리 자라는 법을 검색하고, 비오틴을 챙겨먹고, 아이브로우 틴트로 눈썹이라도 일단 바꿔보는 등 하루하루 머리카락이 자라기를 기다렸다. 뿌염 시기가 오자 미용실을 또 방문했고, (원장님이 상처받지 않게) 관리가 힘들어서 원래 머리색으로 돌아간다고 말씀드렸다. 한 달 동안 염색을 3번이나 거치면서 머리카락은 옥수수 수염처럼 상해버렸고, 이렇게 염색은 서른 비용을 처음으로 시발 비용이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12월, 서른을 한 달 앞두고 있다. 원래 머리색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머리카락은 다시 원래대로 내 색깔이며, 머리카락 상태는 훈장같은 에피소드가 되었다. "나 여름에만 염색 3번이나 했잖아~" 사람이 안하던걸 하면 병난다는 말처럼, 서른 비용이 언제나 달콤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절절히 느끼게 해 준 염색 사건.



한동안 서른 비용은 아마도 없을 예정이다. 대신 <30대에 하고싶은 30가지 바킷리스트> 정하는 중이다. 매년 정하는 새해 목표에 이번에는 특히나 상상력을 발휘해 30대의 내가 하고싶을 일들을 마음껏 적어본다. 설령 이번 염색 에피소드처럼 결과가 이상한들 어떠하리, 다시 염색하면 되는데. , 이건  심하지 않나?  어때, 미래의 나에게는  돌아올 마흔 비용이라는 어마무시한 방패가 있을텐데.




30±1살,

[서른비용]

written by KIM SEONGMIN

@rosy.min

김성민, born in 199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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