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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미녀 Aug 18. 2022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마음 수영>

그림책 <마음 수영>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겨울이 되어 감기에 걸리면 간혹 따뜻한 보리차를 끓여 흑설탕을 타 먹기도 했다. 정수기가 보편화된 요즘 보리차를 잘 먹지도 않거니와 물을 끓일 주전자를 못 찾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귀찮음을 뒤로하고 흑설탕을 듬뿍 넣은 보리차를 후후 불어 마시면 금방 감기가 나을 듯 한 기분이 든다. 이런 버릇은 엄마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병원이 귀한 탓이기도 하거니와 감기 정도로 병원에 안 가던 시절 유독 감기를 앓던 병약한 딸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으리라.


최근에는 감기에 걸려도 흑설탕을 탄 보리차를 마시는 횟수도 줄었다.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 한번 타 준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거 같다. 흑설탕을 탄 보리차는 서서히 사라져 가는 기억처럼 새로운 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는 차라리 낯설었다. 아이들에게 “이거 먹으면 감기 나아”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는 듯했다. 그때의 나처럼. 운동회도 참여 못할 만큼 비실비실거렸던 딸을 기껏 건강하게 만들었더니, 나는 “엄마 같은 삶은 살지 않을 거라고” 라며 소리치는데 그 힘을 쓰곤 했다. 학창 시절에는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이 늘 불안했다. 특히 중학생 때는 유독 외모에 신경 쓰고, 잘 사는 집 친구들이 많았던 터에 엄마의 학교 방문은 이상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어릴 때는 늘 엄마 키가 나의 키를 가늠하는 자였다면, 조금 자랐더니 엄마의 작은 키가 되레 신경 쓰였다.


하수정 작가의 <마음 수영>에서 딸은 “너무 궁금해. 빨리 들어가고 싶어”라고 말한다. “조심해. 위험하단 말이야.”라는 엄마의 말이 딸의 귀에 들릴까. 커 가면서 엄마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던 거 같다. “엄마는 아는 척만 하더라.” 엄마가 아는 것이, 말해주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조금 일찍 세상을 알게 된 나는 더 일찍 사춘기를 보냈다. 우리 집이 구질구질해 보였고 엄마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다른 엄마들처럼 그럴듯해 보이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학교를 졸업하면, 내가 몇 살이 되면, 내가 뭘 하면....... 등등의 말을 하면서 엄마에게 맞서기도 했다.


그림책 속 딸도 “나는 그냥 시작해 볼래”라며 수영장으로 들어온다. 엄마는 멀리 앞서가고 있다. “이젠 나도 혼자, 할 수 있다고.”하는 딸 옆에 “이젠 팔다리로 예전 같지 않아.....”라는 엄마의 모습이 대비된다. 나도 엄마보다 잘 안다고 뻐기고 으쓰대던 때가 기억난다. 엄마의 말을 일일이 고쳐주면서, 더 배운 티를 팍팍 냈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듣던 때는 멀리 사라지고 난 언제든 떠날 준비를 했다. 물이 생각보다 깊자 무서워하는 딸처럼 세상에 나왔더니,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집을 떠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던 것은 한낱 꿈임을 금방 깨달았다. 상사에게 야단을 듣고, 이제껏 배운 것과 다른 차별적인 상황에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릴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은 “엄마”였다.


“엄마 얼굴을 이제 봤어. 많이 외로워 보여.”라며 엄마 얼굴을 돌아볼 생각은 한 것은 그 한참 뒤지만. 엄마는 두 번의 뇌출혈로 수술을 받았고, 장기적인 재활치료가 필요했다. 왼쪽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서서히 나아졌다. 그때서야 나는 엄마가 가정에서 지고 있었던 무게를 나눠가질 수 있었다. 먼저 결혼한 동생 대신 직장을 다니던 내가 홀몸이었기 때문에 타의 반 자의 반 이뤄진 엄마의 간병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의 자는 얼굴을 그제야 보게 되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남편보다는 매일 함께 지내는 딸이 더 좋았던 거 같다. 죽을 고비를 넘겨 그런지 엄마는 늘 내 손을 잡고 잠들었다. 아직 나는 그 손의 감촉을 기억한다.


환자 간병과 재활을 맡기에 나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집에만 있는 생활에 갑갑증을 느꼈다. 엄마가 조금 나아지자 나는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바쁜 회사생활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간혹 엄마의 하루를 곱씹어 본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집에서 잘 쓰지 못하는 한쪽 팔을 가진 채 엄마는 하루 종일 무얼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것을 돌아보기에 그때의 나는 참 철이 없었다. 늘 집에 돌아가면 그 웃는 얼굴로 다정히 말하던 모습이 생각날 때면 나의 철부지 같은 모습도 동시에 떠오른다.


<마음 수영>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나는 엄마와 딸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마주 보고 있는 것을 꼽는다. 엄마와 딸의 거리는 가까우면서도 멀고, 때로 어떤 독자는 너무 냉랭해 보인다고 말한다.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누구도 자신의 삶을 대신해줄 수 없다는 알량한 자기변명 같은 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돌아봤더니 엄마의 삶은 생명이 꺼져가는 촛불 같았다. 하루하루 아픈 엄마를 보면서, 때론 과거로 돌아가 보고, 미래를 허황되게 상상해보면서, 속절없이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까, 아니면 덜 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암 치료를 잘한다는 요양원에 가시면 어떠냐고 말기 암 투병 중이던 엄마에게 물었더니 “자식들 옆에서 죽고 싶다”는 말에 덜컥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결국 요양원이 마지막 집이 되었지만. 엄마에게 한 “다 나으면 우리 집에서 살자”라는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그림책은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나란히”로 끝을 맺고 있다. 엄마를 보내고 한참 동안 우울에 시달렸던 나는 엄마가 준 유산으로 살고 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책이었다. 늘 없는 살림에도 책에 있어서는 아낌없이 투자했던 엄마 덕분이다.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나는 엄마가 아픈 후에야 엄마에 대한 감정을 표현했다. “사랑해” 천년만년 같이 살 것 같은 딸이 갑자기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어땠을까. 때론 엄마의 이야기를 남겨놓지 못해서 안타깝기도 하다. 좀 더 들을걸. 조금 더 기억할 걸. 다시 겨울에 흑설탕을 듬뿍 넣은 보리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감기에 특효라고 권한다. 그 이유를 궁금해하면 나는 엄마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나는 엄마의 딸이었고, 엄마는 나의 엄마였던 기억만으로,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서 있었다.

엄마는 저쪽에 나는 이쪽에 그렇게 우리는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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