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작대기의 공포에 대한 저항
회사 옥상에 멀뚱히 서있다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
"오늘까지 내가 풀었던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는 총 몇 개일까?"
아마... 1,000개는 가뿐히 넘을 것이다. 200문항 토익 시험만 해도 벌써 몇 번인가. 정해진 시간 내 주어진 보기 중 정답 그 하나만을 골라내기 위해 수도 없이 지새웠던 그 밤들이 무색무취하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의식하지 못했던 사지선다 객관식 문형의 길들여짐은 지독했다. 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몇 년째인데, 이 복잡한 인생의 문제까지도 구태여 객관식으로 만들어 풀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보기 안에서 정답 그 하나만을 찾아내기 위해 매번 기를 쓰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이 다 징해진다. '1번 아니면, 2번 아니면, 3번 아니면, 4번 중 꼭 하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항상 그 안에 정답이 있었으니까.' 좀처럼 뽑혀지지 않는 생각.
"너에겐 많은 선택지가 있다. 너는 지금 당장 회사를 벗어나 부산이나 속초로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다. 이런 엉뚱한 선택을 하더라도 생각만큼 큰일이 일어나거나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아무 일없이 잘 돌아갈 것이다." 전형적인 사지선다 객관식 유형의 사람인 내게 던져진 위로의 말. 그렇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 그중 현실적인 조건의 이유로 몇 개가 제외된다 해도 아마 4개보다는 많을 것이다.
수많은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안에서만 인생의 정답을 찾으려는 나.
스스로의 질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질문에만 답하려는 나.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나 탄탄한 논리따윈 중요하지 않은 나.
하나의 문제에서 동그라미가 그려지면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던 나.
빨간 작대기의 공포가 내 인생에까지 엄습할까 봐 지금까지도 부단히 애쓰는 나.
버리고 싶다. 그러나 당장은 버릴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여러 생각일랑 접어두고 그동안 수천, 어쩌면 수만 개의 객관식 문제를 풀어오느라 고생해온 나 자신에게 심심한 사과과 위로를 건네본다. 여전히 객관식 문제일지라도 내 인생에 빨간 작대기가 그어지는 공포에 맞서 보기 5번, 6번, 7번, 8번... 을 찍어보기로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