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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Jan 14. 2024

삶의 이정표가 필요할 때, 수전 손택의 말

2023년 12월 여성 작가의 책 | 수전 손택의 말 (수전 손택 외)

책속의 말

자, 내가 원하는 건 내 삶 속에 온전히 현존하는 것이에요. 지금 있는 곳에, 자기 삶 ‘속’에 자기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온전한 주의를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사람은 세계가 아니고 세계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고 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요. (p.28-29)
전 세상이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사회의 최우선 요건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주변성을 허락하는 거예요. 자칭 공산주의라는 국가들이 그토록 끔찍한 건 그들의 관점이 학교 중퇴자나 주변적인 사람들을 포용할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길바닥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두어야만 해요. (p.57)
전 진실을 허위의 부정으로밖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언제나 저는 뭔가 다른 게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제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걸 발견하죠. 세계는 기본적으로 허위로 가득 차 있고, 진실은 언제나 허위를 ‘거부’할 때 빚어지는 것이죠. 진실은 어떤 면에서 몹시 공허하지만, 이미 허위를 모두 떨쳐낸 환상적이 해방이에요. (p. 99)
“차분하게 사랑하고, 양가감정 없이 신뢰하고, 자기 조롱 없이 소망하며, 용기 있게 행동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끌어내 수고로운 작업을 해낼 수 있다는 건 결코 단순하지 않다.” (p.134)




페미니즘 문학 비평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후속작인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페미니즘을 설명하며 수전 손택을 언급한다. 두 장에 걸쳐 등장하는 수전 손택은 지적이며 이상한 사람이었다. (‘삶은, 지적이고 페미니즘을 은밀하게 견지한 사람의 삶이라 해도, 이상할 수 있다.’, “여전히 미쳐 있는” 중)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증을 품기에는 충분한 묘사였던 셈이다. 그녀의 모든 저서를 읽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빠르게 끓어오른 흥미를 위해서 그녀의 말이 담긴 인터뷰집을 택했다.

“수전 손택의 말”은 “롤링 스톤”지의 창립 공신인 조너선 콧이 파리와 뉴욕에서 수전 손택을 인터뷰한 후, 그 전문을 실은 책이다. 파리에서 3시간 동안 한 인터뷰는 이미 “롤링 스톤”지에 공개되었고, 이후 뉴욕에서 12시간 동안 인터뷰를 한 뒤 그 전문이 실린 건 약 35년 만이라고 한다. 당시는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가 출간된 지 1년 남짓된 시점이었고, 곧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과 “은유로서의 질병”이 출간될 예정이었다. 인터뷰집은 유방암 환자로서 경험과 사유를 담은 “은유로서의 질병”에 대한 질문으로 출발한다.

유방암이라는 병을 마주하고 손택은 자연스럽게 질병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이게 작가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택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서, 오히려 사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질병 앞에서도 ‘최대한 책임감을 갖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만나본 적이 없음에도 당당하게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 인터뷰는 이미 세상에 없는 손택의 모습을 생생하게 꺼내 담았다고 해도 좋다.

질병에 대한 사유로 시작한 인터뷰는 수많은 주제를 넘나든다. 예술, 파시즘, 인간의 성, 은유, 글쓰기, 이분법적 사고, 사랑, 작가란 무엇인가……. 그 어떤 장(章)의 구분이 없는 책이고, 주제 간에 명확한 경계가 없이 자연스레 전환되는 대화에서는 수전 손택의 과거 저서도 순서를 가리지 않고 언급된다. 나는 수전 손택의 저서를 읽은 적이 없어 그 부분은 조금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인터뷰를 읽으며 가장 궁리하게 된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읽은 책이라, 이제까지의 나의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기 좋았다. 나의 과거는 나를 이해하기 급급한 시간이었다. 주변보다는 ‘나’ 자신에게 파고들며, 내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타인이든, 세계이든, 지구이든 환경이든 그 모든 측면에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타인과의 관계 속의 나,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 나에 대해 난생 처음 제대로 사유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살아갈 나날은 ‘나’에게 천착했던 시간과는 사뭇 다를 테다. 그리고 그 한 발을 내디딜 수 있게 해준 계기 중 하나는 바로 이 시간에 이 책을 만난 것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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