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운명 혹은 결정론에 대한 단상

브런치 무비 패스

by 거짓말의 거짓말

*영상 언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 매우 주관적인 감상임을 밝힙니다. 배우의 연기, 연출, 구성 등에 대한 언급은 줄이고 영화의 '이야기' 자체와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 확장한 브레인스토밍을 주로 쓸 예정입니다. 영화에 대한 추천지수는 본글에 앞서 별점과 흥행 예상 지수로 대신합니다.


별점: ★★★

예상 흥행 관객수: 500만 명 / 관상이 910만 명, 밀정이 750만 명인데 관상은 못 봤고 밀정보단 별로.




국민학생으로 불리던 10대 초반쯤 어딘가의 갈림길에서였다. 분명 처음 와본 곳인데 전에 와봤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때엔 그게 '데자뷔'라는 것도 몰랐다.) 직사각형 모양의 책가방을 메고 어딘가로 가는 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난 두 길을 두고 이제 막 10대에 들어선 남자아이는 고민에 빠졌다. 흐릿한 기시감,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나는 어느 쪽으로 갔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기시감 속의 내가 왼쪽 길로 갔다면 나는 오른쪽 길로 갈 테야.'


생전 처음 느껴본 기시감 속에서 나는 '운명'이란 걸 막연히 직감했다. 태어나는 순간 내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몰라. 나는 이미 이 갈림길을 지나갔었고, 지금 지나가려고 하고, 미래의 또 다른 나도 이 길을 지나게 될지도 몰라. (그때엔 '평행우주론'도 몰랐다.) 어쩐지 내 삶이 누군가가 결정해 놓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내 삶은 내 거란 말이야. 작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기시감 속의 나는 왼쪽으로 간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오른쪽 길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또 한 번의 기시감이 들었다.


두 번째의 기시감 속에서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니 안돼. 다시 왼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세 번째의 기시감이 찾아왔다. 세 번째의 기시감 속에서 나는 오른쪽으로 가려다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계속해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엔 '인셉션'이란 영화도 없었다.)


결국 어린 나는 '내가 어디로 가든지 어쩌면 내가 가는 모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

움을 느꼈다. 그 당시 내가 결국 어디로 갔는지는 지금은 기억 나지 않는다.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어떤 종교도 없고, 운명론도 믿지 않는다.


영화 '명당'을 가르는 핵심 소재는 '풍수지리'다. 땅의 기운을 받아 인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실제의 인물, 장소, 사건과 일치하는 영화상의 모든 내용은 '허구(거짓말)''라는 말처럼 역사극의 형태를 뗬지만 사실상 만화에 더 가깝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 만화인 '고스트 바둑왕'을 떠올렸다. 고스트 바둑왕은 '바둑'을 소재로 한 만화인데 바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봐도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작가가 나름의 세계관을 만들고 독자를 설득시켜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 녹아들게 하는 것이다.


영화 '명당'은 '풍수지리학'과 '운명론'이라는 두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극 초반에 지관(땅의 기운을 살피고 왕에게 조언하는 관직)인 조승우(박재상 역)가 왕의 무덤 자리를 결정하는 장면에서 직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왕의 묘자리가 사실은 흉당이라는 것. 조정을 장악한 백윤식(김좌근)이 죽은 선대 왕을 흉당에 묻고 자신의 조상을 명당에 묻기 위해 조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승우는 아내와 자식을 잃게 된다.


조승우의 집이 불에 타는 장면에서 조금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언 한 번으로 가족을 몰살시키는 '선악 구도' 설정이 작위적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핵심 갈등이 되는 '2대 천자지지(이 땅을 차지하면 2대에 걸쳐서 왕이 된다)'도 조금은 벙쪘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명당이 만든 세계관에 자연스레 녹아들게 됐다.


개인적으로 흥선대원군 역할을 맡았던 지성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로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 구성에 사실감을 불어넣고 몰입감을 준다. 너무도 명징한 선악 구도(선: 조승우 / 악: 백윤식), 만화적인 이야기 전개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나온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초대박 흥행 영화들은 영화를 보다 보면 웃음소리가 많이 들리거나, 우는 사람이 많거나, 과몰입 상태가 되거나 하는 극장 안에서의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명당'은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3~4차례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그쳤다. 큰 흥행을 거둔 '신과 함께 1'처럼 사람들을 줄줄 울리거나,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조여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했던 '곡성'과 같은 임팩트는 없었다.


추석 호재, 믿고 보는 배우,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결말의 호흡조절이 마음에 들어서 별을 2개 반에서 3개로 상향.


개봉은 이틀 뒤인 9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