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인테리어 성애자 본능이?

나는 원래 시리즈 1

by 거짓말의 거짓말

나는 원래 뭘 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진 않지만 귀찮다고 해야 할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는 일 년에 옷을 두 번 정도 사는데 명절날과 소개팅 전날"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지금 입고 있는 드로즈(속옷)도 예전에 TV를 보다 홈쇼핑으로 8장인가 10장 세트를 한 번에 사서 입고 있다. 홈쇼핑으로 뭔가를 산 적이 딱 3번 있는데 그중에 2번이 드로즈다. 드로즈에 구멍이 나거나 밴드가 헐어버리기 전까지는 아마도 쭉 이 드로지들을 입지 않을까 싶다.


소개팅을 앞두고 옷을 사러 갈 때도 소개팅은 좋지만 옷을 사는 것은 어쩐지 귀찮다. 단,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는 예외다. 그때만은 소비 세포가 활성화돼서 '어차피 돈을 쓰러 놀러 나온 거니까'하고 별로 필요도 없는 것을 주섬 주섬 사 오곤 한다. 대부분 한국에 돌아와서 포장도 안 뜯고 어디다 처박아 뒀다가 잃어버리거나 4~5년이 훌쩍 지나 이사를 할 때쯤 '아, 이런 걸 샀었지' 하고 난처해하는 경우도 많다.


설 연휴 전 주말에 이번에 새로 입주한 오피스텔(원룸)에 들어갈 각종 가구와 생활 용품을 주문했다. 따로 이사 차를 부르지 않고 인터넷으로 주문해 집안을 채울 생각에서였다. 세종시 정부청사 건물은 용의 형태를 따서 1동부터 16동까지가 길고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다. 청사 1동이 국무총리비서실, 6동이 국토교통부, 13동이 산업통상자원부 뭐 이런 식이다. 1동에서 16동까지 청사 내부를 걸어서 가려면 족히 30분은 넘게 걸릴 정도로 큰 크기다. 내가 얻은 원룸은 보증금 300에 월세 36만원(1만원을 더 깎고 싶었는데 실패했다)으로 13동 산업통상자원부와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오늘 오전 기자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택배 아저씨(사실 총각일 수도 있지만 편의상 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번에 주문한 책상을 오늘 점심쯤 배송할 예정으로, 택배비는 착불 3만원이고 조립도 해주신다고 했다. 하지만 평일 점심은 어쨌든 공식 업무 시간이므로 집에서 책상을 받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그럼 문 앞에다가 책상을 두고 절반 정도 조립해 두고 간다고 하셨다. 그 이후 식사가 한창일 때 택배 아저씨에게 전화가 와서 확인을 못하고 나중에 부재중 전화 목록을 확인했다. 늦었지만 착불 택배비 3만원을 계좌 이체했다. 적당히 오늘 일을 마무리하고 평소보다 일찍 세종 청사를 나왔다.


오는 길에 오피스텔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하이마트에 들렸다. 전날 대충 온라인으로 가격대를 알아본 대로, 7~9만원 선에서 전자레인지 하나를 살 생각이었다. 여자 직원분에게 "혼자 살거라 기본형 전자레인지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가장 저렴한 SK리빙 전자레인지와 하이마트 PB 전자레인지 하나씩을 추천해 줬다. 한 15초 고민한 뒤에 SK리빙 전자레인지를 사기로 하고 6만9000원을 결제했다. 보통의 나의 구매란 이렇다. 필요한 물품을 사전에 조사하고, 현장에서 대략 2가지 정도의 선택항을 본다. 그리고 둘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산다. 가장 곤란한 경우라면 상점의 직원이 과잉 친절을 베풀며 상품에 대해 입어보라거나 추천을 해줄 때다. 예를 들어 겨울 잠바를 보러 갔는데 행여라도 상점 직원이 "어머, 고객님 너무 잘 어울려요."라는 말을 하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그것을 사고야 만다.


전자레인지 박스를 들고 오피스텔에 도착하니 과연 문 앞에 책상이 배송돼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말과 달리 내가 점심에 전화를 받지 않았던 탓인지(착불 택배비를 바로 못 받아서 화가 났을 수도...) 책상은 전혀 조립돼 있지 않았다. 지난 주말 쿠팡에서 8만9000원을 결제하고 굉장히 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착불 택배비 3만원을 더하면 12만원에 무료배송을 해줬던 비교 상품이랑 큰 차이가 없는 가격이었다. 책장과 책상 일체형 구성이라 생각보다 엄청 컸다. 책장 중단에 책상 판을 걸치고 책상다리를 조립만 하면 돼서 조립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책상다리 부분을 연결하는 플라스틱 돌계형 나사 부분이 싸구려라 그런지 잘 맞지 않아 한동안 고생했다.


책상과 함께 문 밖에는 전날에 주문한 헤어드라이기도 와 있었다. 원래 뭔가를 사도 '그래, 내가 이걸 샀지' 하고 그치는 타입이지만 어쩐지 나만의 공간이 새로 생기니 뭔가 새 제품을 바로 사용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저 밑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평소에는 소비 욕구 제로인 나지만 환경이 변하니까 성향 자체도 그에 맞춰 변하나 보다.


책상을 포장했던 박스 상자를 들고 1층으로 내려와 재활용을 하고 편의점에 들렸다. 전자레인지를 시험해보기 위해 편의점 CU에서 춘천 닭갈비 도시락과 1+1 유산균 음료, 종량제 봉투 몇 장을 샀다. 초딩시절 게임보이 신상 팩을 받아 든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방으로 올라와, 크리스마스 선물을 뜯어보듯 춘천 닭갈비 도시락의 비닐을 뜯고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동시에 아직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보만(BOMANN) 전기 포트기를 씻고 물을 담은 뒤에 컵라면용 물을 끓였다. 새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새 전자레인지로 돌린 편의점 도시락과, 새 전기 포트기로 끓인 물을 넣은 육개장 컵라면을 먹으니 뭔가 새 나라의 어린이라도 된 듯 신나는 기분이었다.


전날 늦게 잔 탓에 저녁을 먹고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10시쯤 일어나서 유튜브를 좀 보다가 샤워를 하고 새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새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어쩌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인테리어 성애자 DNA가 있거나, 새 방 꾸미기 페티시 같은 게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은 대부분 갖춰졌다. 아직 퀸 사이즈 매트리스만 안 왔는데 새 매트리스를 사용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인다.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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