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균열의 강

by 인생정원사 선우
아플 고(苦), 이야기 담(談).
잠이 오지 않는 밤, 혹은 잘 수가 없는 밤에 쓴 글들. 이곳에서는 엄마도, 정원사도 아닌 오롯이 나를 기록합니다. 일기보다 투명하고, 편지보다 깊은, 푸른 물의 아픈 시간, 그 기록을 다시 불러와 브런치북 <새벽고담>에 담았습니다. 새벽의 글들을 다듬어 다시 올린다면, 고통도 조금은 무뎌질 수 있을까요.


남은 것은 황무지였다. 이 광활한 적막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1. 균열의 강


그것은 하루 아침에 오지 않았다. 물이 채워지다 넘쳐 흐르는 것처럼, 혹은 마지막 지푸라기에 가라앉은 것처럼 어느 순간 왔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예고 없이 가라앉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다. 모든 일상이 삐걱거렸다.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정원이 아빠가 아이를 등교시켰다. 약을 먹었고, 커피를 삼켰고, 전화를 걸었다. 사람을 만났고, 도장을 찍었다. 쫓기듯 일을 처리했다. 그날 오후, 아이를 마주한 순간 주저앉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아이의 손을 ‘꽉 붙들었다.’ 집도 먼 낯선 곳에서 우리 둘뿐이었다. 나는 정원이를 돌봐야 했다, 집으로 가는 일도 나의 몫이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떻게 운전했는지 모르게 집에 도착해 아이를 맡겼고, 그길로 잠이 들었다. 겹겹이 쌓인 고통 사이에 숨겨진 건 살아야겠다는 책임이었다.

온실 밖, 강

이곳은 안전했다. 희미한 빛을 보며 바깥도 따뜻할 것이라 꿈꾸었다. 바깥은 어둡고 축축했다. 온실에는 창문이 없었다. 나가는 문은 잠겨 있었다. 비와 바람이 들지 않는 메마른 흙을 움켜쥐었다. 흙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이곳에서 뿌리내릴 수 있을까.’

정원이는 일곱 살이 채 되기 전에 장애 등록을 했다. 안전했던 온실은 사라졌다. 온실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앞은 캄캄했고, 발밑은 거친 자갈투성이였다. 이곳에서 다시 처음부터 가꿔야 했다. 하나하나 조각난 돌을 치우는 손이 거칠어졌다. 손끝이 붉게 물들었다. 어디선가 물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깊은 밤, 깊은 물, 축축한 땅. 강이었다.


하강하는 유리공

‘있잖아. 나는 떨어지는 공일까, 혹은 그 공을 놓쳐버린 손일까.’ 한없이 마음이 추락하는 날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떨어지고 있는 유리공이 된 것만 같았다. 지면에 부딪히면 산산이 조각날까, 아니면 다시 튀어 오를까. 잘 모르겠다.

무엇인가 하고 있을 때는 무엇을 쥐고 있는 쪽이었다. 손에 꽉 차다 못해 살짝 큰 공은 놓칠까 두려운 크기였다. 긴장으로 온몸은 아플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공을 ‘꽉 붙들었다.’

하강의 틈이 또 찾아올까 무서웠다. 일부러 촘촘히 하루를 계획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이어 붙였다. 조각의 시간은 반짝거렸다. 그 충실함은 잠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통증이 출렁이듯 몸을 훑어 내렸다. 결국 공을 놓쳤다. 마음에 쳐둔 겹겹의 그물이 빛을 잃고 희미해졌다. ‘아, 안 돼. 결국 빠져버렸어.’


스노우볼

불안은 마치 깊은 강물처럼 나를 삼켰다. 무엇이라도 도피처로 삼아 숨기로 했다. 무엇인가 동그란 것을 잡았다. 유리공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물방울 같은 스노우볼 같았다. 그곳에서 잠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쪼그라들었던 폐포가 펴지면서 호흡이 돌아왔다. 작은 불을 밝혀 그 온기에 기대었다. 깊고 깊은 날것의 이야기를 꺼냈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어두운 물밑에서 비로소 반짝이는 물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나를 기억했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아, 이제 숨을 쉴 수 있어. 다행이야.’ 뭍에 닿은 나는 맨발이었다. 여전히 하루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이야기는 마음속 보물 상자에 넣어두었다. 상자는 마음의 정원, 어두운 나무 그림자 아래 고요히 묻었다.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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