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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Nov 04. 2024

이름은 존재가 아니다

라라크루 수요질문. 이름과 관련된 사연이나 일화가 있나요?

이름에 대한 개념이 막 잡히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름과 내가 마치 한 몸 같았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기에 좋은 느낌도 싫은 느낌도 없었다. 하늘을 나는 동물을 새라고 부르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생물을 물고기라 부르는 것처럼 나는 처음부터 희정이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현실을 깨달았다. 그 무렵에는 한 반 인원이 오십 오명 정도였는데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서 않았던 1학년 교실에서 희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나를 포함해서 5명이나 있었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그때만큼 같은 이름의 친구를 한꺼번에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 일은 내 이름이 얼마나 흔한지를 확실히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내 안에서는 예쁘고 특이한 이름에 대한 동경이 피어올랐다.


두 번째 일화는 대학교 때이다. 신입생 때 들었던 교양 과목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수업을 같이 들었던 다른 과 남학생의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 남학생의 이름도 희정이었다. 수업 첫날 교수님이 출석을 불렀을 때 그 이름에 대답하는 굵은 목소리의 남학생을 보고 부끄럽고 놀란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졌던 그를 힐끗거리며 교수님과 친구들이 이름으로 나와 그를 같이 놀릴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그 아이에 대한 다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내성적이었던 내가 그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그날 이후 내 이름이 여성만이 가지는 고유명사라는 편견은 깨졌다.


세 번째는 한때 야권 차기 대권주자라는 대세론까지 있었던 유명 정치인과 관련된 일화이다. 그날은 의료 관련 콘퍼런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거리가 좀 있어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혹시 나중에라도 합석을 요구할까 싶어 택시 앞좌석에 올랐다. 운전하던 기사님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미간의 주름이 깊이 새겨져 있어 초로의 중년처럼 보였다.


차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기사님이 내 쪽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어휴. 유명하신 분이 제 택시에 탔네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명찰에 이름이 말이에요. 충남도지사하고 이름이 같으시네요.” 그 말을 하고 기사님은 껄껄 웃었다. 콘퍼런스에서 나눠주었던 명찰 목걸이를 깜빡하고 벗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때부터 기사님은 이 나라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그저 앞을 주시하고 네, 또는 그렇죠로 어색한 대답을 하며 관심도 없는 이야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후로도 마트 계산대 앞에서 계산 후 포인트를 적립할 때나,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처럼 내 이름이 드러나는 자리에 가면 종종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나와 성까지 완벽히 일치하는 그 정치인이 불미스러운 일로 수감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이름의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한동안 세간에 내 이름이 뉴스 머리기사를 매일 장식했던 시절에는 괜스레 창피해 이름을 감추며 살았다. 그 시절도 지나니 이제는 전직 정치인이었던 그도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그와 함께 내 이름도 평범한 시민의 자리로 돌아왔다.


돌아보면 나와 이름이 같던 그 어떤 사람도 실제로 관련이 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 이름의 이미지가 좋아지면 내 계급도 상승하는 기분이었고, 이름의 이미지가 나빠졌을 때는 함께 하락하는 감정을 느꼈다. 마치 내가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닌 이름이 나를 가진 것처럼 이름에 끌려다녔다. 지금은 이름 때문에 속상하지는 않다. 반에서 몇 번째 희정으로 불리던 어린아이는 이제 이름보다 직함이나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날이 더 많으니까.


굳이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도 살고 싶지도 않다. 이름이 아닌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짧은 인생을 즐기고 싶다. 내게도 소중한 그들에게 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질 뿐이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안희정이라는 이름이 아닌 존재 자체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으리라.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수요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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