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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Like Song Jan 14. 2024

Track01. 루비 반지

2015년 03월. 포르투갈 리스본

 카우치 서핑이라는 무료 숙박 플랫폼이 있다. 집주인은 잠자리를 제공하고, 여행자는 돈 대신 여행담이나 자신만의 장기로 호의에 보답하는 시스템이다. 방문하고 싶은 도시를 검색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프로필이 나오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자기소개와 함께 숙박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집주인이 그 메시지를 수락하면 잠을 얻어 잘 수 있는 것이다. 


 낭만적인 플랫폼이지만, 수요와 공급법칙은 그 속에서도 작용한다. 유명 관광지에 사는 집주인에겐 하루에도 2~30통의 메시지가 쏟아지고, 여행자인 당신은 그 속에서 스스로를 팔아야 한다. 재워준 사람이 남길 수 있는 후기(reference)가 없는 신입회원이라면 더 힘들다. 여행도 경력직이 우선인 세상이다. 

경력직의 프로필.jpg


 첫 한 달 동안 작성한 30여개의 요청이 모조리 다 거절당했다. 자기가 광고 직종에 종사하니 광고기획서를 하나 첨부하라는 놈까지 있었는데, 그 메시지를 거절당했을 땐 호스트에게 주먹을 날리는 꿈을 꿨을 정도였다. 낭만은 그냥 책으로 봐야 하는구나…하고 체념할 무렵,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 소녀가 답을 보내주었다. 내가 쓴 문장 하나하나를 되짚어가며,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은 감동을 넘어 어떤 깨달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이가 편지 한 통으로 나를 믿어줄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나와는 관계없다고 믿었던, 허구일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실재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메일 한 통으로 나를 믿어준 마리아나.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물해준 그녀에게, 나 역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가끔씩 떠올라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들 수 있는 선물. 포르투갈어 노래를 준비해가면, 어디서든 노래가 들릴 때마다 이 만남이 떠오르지 않을까?
 
  관심사를 물어보는 척,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를 슬쩍 물어봤다. 그녀가 고른 곡은 Anel de Rubi(루비 반지)라는 노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끼던 루비반지를 팔아 비싼 콘서트 티켓을 구해왔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이미 수많은 거절을 당한 만큼 더 이입해서 노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노래는 후렴구 한 마디 부르면 다음 마디는 상대방이, 그 다음 마디는 다같이 부르면서 친구가 될 수 있는 마법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튿날에는 호스트의 학교 친구들을, 그 다음날에는 할머니와 삼촌을 만나 친해졌다. 그리고 포르투 북쪽까지 약 400km 이상을 그들의 차를 얻어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마리아나의 친척들과 함께.

 스페인 이후부터는 전략적으로 각 나라별 유행가를 배웠다. 매번 그런 노래를 고르진 못했지만, 배운 노래의 숫자가 10곡을 넘어가자 그 자체가 이야기거리가 되어 카우치 서핑 수락율이 올라갔다. 20곡을 넘겼을 때는 80%의 호스트가 요청을 수락해서 숙소를 골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노래는 순풍이 되어 나의 배낭을 밀어주었고, 목표했던 6개월 중 5개월 간을 카우치 서핑만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냉정한 거절 세례와, 그 속에서 손을 뻗어준 소녀였다. 


-

♬ Rui Veloso – “Anel de Rubi(루비 반지)”

https://www.youtube.com/watch?v=EHT0aVUCSTY


...Ai o que eu passei só por te amar

A saliva que eue gastei para te mudar

Mas esse teu mundo era mais forte do que eu

E nem com a força da música ele se moveu


....아, 당신의 사랑을 위해 해온 일과

당신을 돌려놓기 위한 그 말들

하지만 당신의 세계가 너무 강해서 당해낼 수 없네요

음악의 힘으로도 당신을 움직일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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