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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리메 Oct 24. 2020

엄마가 살아온 전쟁 같은 시간들

아픔이 많은 엄마가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였다.

어느 날 의사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 왜 전쟁도 아닌데, 평상시에도 총을 들고 상대방을 겨두듯이 보초를 서고 계실까요?" 그렇게 계속 긴장 속에 있으면 소화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도 버티기 힘들어요. 좀 내려두세요!!




우리 엄마에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다. 누군가에게 시험을 보듯 사는 우리 엄마는 불안증과 강박증 그리고 예민함이 심해서 그런지 참 독특하시다. 근데, 그 독특함이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을 괴롭힌다. 그래서 옆에서 보고 있는 내가 더 짜증을 낸다.


"엄마 그냥 놔두세요. 그거 지금 안 치운다고 누가 뭐라 안 해요. 집 안 무너져요." 이래도 엄마가 불편하시단다. 집안이 어지러우면 정신이 사납다고 뭔가 정리 정돈이 싹 되어야 마음이 놓이신다고 하신다. 그렇게 한몇 시간을 치우시면 체력도 약하셔서 또 몇 시간을 누워계셔야 충전되신다.


이렇게 된 이유가 뭘까? 대체 엄마는 왜 꼭 저렇게 사셔야 할까? 집안이 어지러울 수도 있고, 치우다 힘들면 나중에 치워도 되는데? 그런데,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엄마가 살아오던 환경들과 엄마가 겪어온 일들이 엄마를 점점 더 몰아갔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자신을 더 못 살게 만드셨다. 그게 편하시다면서 말이다.





모델하우스에 사는 우리 엄마


나는 어렸을 때 우리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나이가 드셔서 조금 내려놓으신 모습이 이 정도지만 어렸을 땐 1주일에 주말은 온 집안을 다 엎는 청소는 기본이고 먼지 털기부터 장식장에 조그마한 접시까지 다 닦아야 하는 우리 집의 노동절이다.


나는 매주마다 그렇게 청소하는 엄마가 이해 안 돼서 입이 다 삐져나온 상태로 거실로 기어 나와 겨우겨우 닦는 시늉을 하면 어김없이 뒤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나의 등짝을 애정 하는 우리 엄마다. 역시나 선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 바로 등짝 스매싱 날려주시고, 똑바로 안 하냐고 불호령이시다!!


어떻게 아셨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지만, 한 번은 베란다를 터서 거실이 널찍한 우리 집 창문 쪽 바닥을 닦고 있었다. 그때도 어김없이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발로 슥슥 문지르기만 했다. 사실 청소를 해도 티도 안 나고, 별로 닦을 것도 없었다. 근데, 우리 엄마는 탁자 밑이랑 그 옆이랑 그 앞을 다 닦으라고 호통을 치신다. 안 그래도 번거롭고 귀찮은데, 대충 좀 살면 안 되냐는 나의 말에 집안이 깨끗해야 밖에서도 대접을 받는다나 뭐라나!!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다들 한 마디씩 한다. “모델하우스에서 사는데? 여긴 집이 아니네,,, 아무도 안 살아요?” 나는 솔직히 정감이 안 간다는 말로 들리는데 엄마는 아니신가 보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시는 걸 보면 이렇게 정리정돈이 말끔해야 마음이 놓으시는 것 같다.







빨래는 손빨래가 제맛!!


세탁기는 통돌이 쓰다가 이사 간 다면서 트롬 최신형을 사면 뭐하나? 손빨래가 제일 좋다며 매번 그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빨간 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 세제를 잘 푼 물에 빨래들을 담가 둔다. 그러면 뗏물이 쪼옥 빠진 빨래들을 일일이 하나씩 문지르고 닦고 해서 말끔하게 벗겨낸다. 그게 시원하신가 보다.


그렇게 한차례 하고 나면 아버지의 옷감을 세탁하신다. 제일 더럽고 냄새도 많은 우리 아빠의 작업복들이다. 기름 떼와 얼룩진 자국 등 하나부터 손이 안 가는 곳이 없는 우리 아빠의 낡은 옷은 아빠의 자랑이자 명함이었다. 그런 옷을 한번 빨면 기진맥진 기운이 다 빠지셔서 한참을 누워계신다. 그러면서도 일을 손에 놓지 못하신다.


근데, 요새 엄마가 아프시고 집안에 안 계시고 나서 내가 다 맡아서 하다 보니 보통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 힘드셔도 가족들을 위한다며 내색 한번 안 하시고, 힘들어도 꾸준히 버텨오며 그렇게도 무디게도 해오셨다.




친정집인데 시집살이하는 우리 엄마!!


집안일뿐이랴! 할머니의 시집살이가 아닌 친정살이도 한 몫했다. 대체 시집도 아닌데, 왜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하라는 일을 다 도맡아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된장, 막장, 고추장은 다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한다. 다른 자녀들은 용돈을 많이 줘서 돈을 안 받지만 엄마는 용돈을 적게 줘서 돈을 받아야 한단다. 그런 억측이 어디 있을까? 시집이 아닌 친정을 가는데 매번 과일을 한 바구니씩 사다 바쳐야 하고, 한번 안 사가면 오지 말라고 너네 안 와도 된다고 그러는 이상한 외할머니셨다.


좀 신기했던 일은 내가 고등학생 때 엄마가 할머니 집에서 설거지를 하시는데 “할머니가 뜨거운 물 틀어놓고 하라고 따뜻하게 말하셨다” 그러자 엄마가 내게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어렸을 때는 엄청 추운 겨울날 손이 시려서 뜨거운 물 쓴다고 했더니 , 뭐가 엄살이냐며 뭐라 해서 겨우겨우 설거지를 끝냈는데 손등이 다 터서 따가워 밤새 끙끙 앓으셨다며!! 지금은 이렇게 뜨거운 물 틀고 하라는 말이 웃겨서” 라며 웃으셨다.


엄만 어려서부터 혼나지 않아도 될 일을 억울하게 혼나시기만 했단다. 뭔가 할머니 마음에 안 들면 엄마가 원인이라며 혼나셨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강박적으로 시험 보듯이 삶을 살아가시게 된 건 아닐까 싶다.


할머니 이야기는 저번에 했지만 사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있어 글로 적기 모자를 정도로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은 게 참 많다. 또 한 가지를 전해 본다.



삐져서 서울 올라간 딸년이 된 엄마


내가 어렸을 때 이야기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나를 참 이뻐해 주던 큰삼촌이 돌아가셨다. 그땐 너무 어려서 멀리 가신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삼촌의 죽음은 그리 슬프지 않았다. 다만, 못 본다는 것이 그리울 뿐이었다.


그때 삼촌은 돈을 번다며, 노동일을 하며 학비를 모으고 계셨다. 그러다 아파트 3층 높이에서 추락하며 머리를 크게 다치셨는데,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만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게 내가 아는 삼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근데, 여기서 할머니의 이상한 버릇이 하나 나온다. 바로 큰딸 챙기기!! 우리 큰삼촌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인천에 작은 아파트를 장만했고, 거기서 큰 이모네와 같이 살았다고 했다.


그 아파트가 삼촌 명의로 되어 있는데, 삼촌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미시령 고갯길에 삼촌을 뿌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더니 할머니가 식구들을 불러놓고 한다는 말이 "저 집 훈이네 주자!! 어차피 아무도 안 살 텐데 그냥 훈이네 쓰라고 해!! (여기서 훈이네는 큰 이모 아들 이름으로 할머니는 손자들 이름으로 자녀 이름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은주네 ㅎㅎ)


그러자 다들 한 마디씩 하며 그건 말이 안 된다 큰삼촌이 번 돈으로 장만한 집을 어떻게 사느냐! 큰 이모가 얹혀살다가 들어가는 게 말이 되느냐!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다며 의견 충돌을 일으키더니 할머니 결국 할아버지 카드를 드셨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눈짓으로 그렇게 하라고 시늉하듯 찡그린다)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라고 물어보자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못 당하시기에 또 맞을까 걱정하며 "그게 낫지 아무래도, 아무도 안 사는 것보다 훈이네가 사는 게 낫지 암!! 이러면서 도망가듯이 방을 나섰다.


그때 우리 엄마도 한마디를 하셨다. 동생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어떻게 우리가 마음대로 가지냐고 그건 말이 안 된다고 그리고 만약에 줘도 막내아들에게 줘야지 왜 언니에게 주느냐고 그건 떠난 큰삼촌도 원치 않을 거라고 (그때 큰 이모부는 도박을 크게 쳐서 경찰을 하다가 잘렸다. 그래서 큰 삼촌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고, 돈이 부족했던 큰 딸 내외가 그렇게 사는 게 싫으셨던 할머니는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고 우겼다.)


그렇게 엄마는 올바른 소리를 하셨는데, 할머니는 말이 안 통한다며 엄마를 뭐라 하셨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우리 집은 할머니 댁을 가지 못했다. 아니 엄마가 안 가셨다.


나도 정확한 건 모르겠으나 엄마에게서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이랬다. 할머니 댁에 놀러 오던 손님들이 물었단다.


우리 엄마가 안 보인다고 어디 갔냐고 그랬더니 할머니가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년이 지 동생 집 안 준다고 삐져서 서울로 이사 갔으니까 다시는 그년 얘기 입밖에도 내지 말라”라고 그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고 다니신다고 엄마가 시장을 지나가는데 할머니 친구분께서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엄마는 정이 떨어져서 못 가겠다고 하셨다.


과연 이 할머니는 우리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신 걸까? 우리 엄마는 나를 끔찍이 생각하셔서 내가 숨이 막힌다고 도망 다니듯 따로 살려고 했지만 지금은 엄마의 사랑을 알기에 오히려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간다.


그런데 어떻게 할머니에게서 우리 엄마가 태어났지만 나를 할머니처럼 대하지 않으시고 다르게 사랑해주셨는지 그 모진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도 내 옆에 엄마가 있음에 감사하는 오늘이다.






아마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수많은 실패에 좌절하다 못해 생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게 삶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아무래도 우리 엄마가 우리를 보며 버텨오듯이 가족인 거 같다.


근데, 오히려 할머니는 우리 엄마에게 사랑은커녕 왜 모든 말들 행동들을 다 싫어했을까? 거기다 왜 거짓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안 좋게 말했을까? 과연 할머니는 지금 당신께서 한 일을 알고 뉘우치고 계실까?


엄마는 아마도 할머니에게 받은 상처로 다른 이들을 잘 못 믿는다. 자신을 싫어할 거란 착각들 그리고 일어나지도 않을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하루하루를 그렇게 버티신 거 같다. 그게 자신을 학대하는 방법인지 모르고 말이다.






엄마가 겪어 온 그 수많은 시간들을 어찌 내가 이런 조그만 공간에 담을 수 있으랴!


하지만 이 공간에 조금이라도 담아진다면 엄마가 숨통이 조금은 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가 조금은 지금 보다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기에, 나는 오늘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중엔 엄마를 위한 하나의 단편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리 엄마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쓸쓸하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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