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K팝 상술의 설계도

기업이 우리 취향을 조종하는 방식

by 닥터 F

"내 최애는 달라. 걔는 진짜 특별해." "나는 남들 다 좋아하는 유행가 안 들어. 내 취향은 확고해."


지금 뜨끔했나? 미안하지만, 이 챕터를 읽고 나면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가 주체적으로 아이돌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수많은 그룹 중에서 내 심장을 뛰게 한 '운명' 같은 만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70년 전, 독일의 한 까칠한 철학자가 이미 너의 그 운명을 예언했다면 어떨까?


그의 이름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그는 대중문화를 예술이 아니라 **'공장 제품(Industry)'**으로 규정했다. 그의 이론을 빌려 K팝이라는 거대한 공장의 설계도를 훔쳐보자. 당신의 '취향'이 어떻게 엑셀 파일 위에서 조립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1. 붕어빵 틀의 비밀: '규격화(Standardization)'


K팝 아이돌 그룹을 자세히 뜯어보자. 그룹명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노래 스타일도 다르다. 그런데 이상하게 **'구조'**는 똑같다.


압도적인 비주얼 센터 (입덕 담당)

고음 셔틀 메인보컬 (실력 담당)

동굴 저음 래퍼 (힙함 담당)

귀여운 막내 (씹덕 담당)

리더 (인성/진행 담당)


마치 RPG 게임 파티원 구성처럼, 어느 그룹을 가도 이 역할 분담은 소름 돋게 일치한다. 왜일까? 이것이 바로 아도르노가 말한 **'규격화(Standardization)'**다.


회사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흥행 공식'**을 데이터로 가지고 있다. "비주얼 멤버로 시선을 끌고, 실력파 멤버로 라이트 팬을 잡고, 관계성(케미)으로 코어 팬을 가둔다." 이 공식에 맞춰 연습생들을 레고 블록처럼 끼워 맞춘 것이 바로 아이돌 그룹이다.


우리는 "이번 신인 그룹은 완전 새로워!"라고 환호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건 **'포장지'**가 바뀐 것이다. 내용물인 **'구조'**는 1세대 H.O.T. 시절부터 지금까지 놀라울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회사는 당신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표준 규격에 맞춰 조립해 놨다. 당신은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게 아니라, 잘 짜인 **'표준 모델'**을 구매한 것이다.


2. 다름의 환상: '사이비 개성(Pseudo-individuation)'


"아니야! 우리 애들은 컨셉이 확실해. 세계관도 독특하고 음악 색깔도 달라!"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맞다. 요즘 아이돌은 저마다의 '컨셉'이 있다. 누구는 'Y2K', 누구는 '광야(사이버펑크)', 누구는 '하이틴', 누구는 '이지 리스닝'.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것을 **'사이비 개성(Pseudo-individuation)'**이라고 불렀다. 번역하자면 **'가짜 개성'**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아반떼, 쏘나타, 그랜저. 색깔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르다. 하지만 그 안을 굴러가게 하는 엔진과 부품, 작동 원리는 현대자동차라는 공장에서 만든 똑같은 기술이다.


K팝도 마찬가지다. 청량 컨셉이든, 걸크러쉬 컨셉이든, 그 뒤에서 곡을 쓰는 작곡가들은 같은 풀(Pool)에 있다. 안무를 짜는 트레이너들, 마케팅을 하는 방식, 팬덤을 조련하는 어플(위버스, 버블)까지 모든 **'생산 공정'**은 똑같다.


회사는 아주 미세한 차이(옷 스타일, 머리색, 뮤비 스토리)를 엄청난 차이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골라 먹는 재미"**를 준다. 우리는 A 그룹 대신 B 그룹을 선택하면서 "나는 주체적으로 선택했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건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의 차이일 뿐, 결국 **'중국집 사장(자본)'**이 차려놓은 메뉴판 안에서의 선택이다.


최근 유행하는 **'MBTI 마케팅'**이 대표적인 예다. 회사는 멤버들의 MBTI를 공개하고 캐릭터를 부여한다. "얘는 T라서 시크해", "얘는 F라서 다정해". 우리는 그 캐릭터에 열광하지만, 그것조차 회사가 멤버를 '소비하기 쉬운 캐릭터'로 라벨링(Labeling) 한 결과다. 진짜 그 사람의 복잡한 내면이 아니라, 대중이 소비하기 딱 좋은 '납작한 개성'. 그것이 바로 사이비 개성이다.


3.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들: '음악의 물신화'


가장 아픈 팩트를 찔러보자.


당신은 정말 **'음악'**을 듣고 있는가?


음원 사이트에서 스밍(스트리밍)을 돌릴 때, 우리는 소리를 꺼놓거나(Mute) 이어폰을 꽂아놓고 잠을 잔다. 노래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 **'재생 횟수'**를 올리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이를 **'음악의 물신화(Fetishism in music)'**라고 비판했다. 음악이 가진 본질(아름다움, 메시지, 감동)은 사라지고, 음악이 가진 **'교환 가치(순위, 판매량, 기록)'**만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다.


"이번 곡 별로인데?"라고 생각했다가도, 멜론 1위를 찍고 빌보드에 올라갔다는 뉴스가 나오면 갑자기 노래가 좋아 보이거나, 적어도 "역시 대세는 다르네"라며 내 취향을 수정해 본 적 없는가?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회사는 차트 순위, 초동 판매량, 뮤비 조회수 같은 **'숫자'**를 마케팅한다. 우리는 그 숫자를 소비하며 "내가 1등 가수의 팬이다"라는 우월감을 느낀다. 이 구조 속에서 '음악성'은 뒷전이 된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3분짜리 숏폼용 노래가 판을 치는 이유다. 어차피 팬들은 음악이 아니라 **'성적표'**를 사주니까.


4. 설계도를 찢고 탈출하라


여기까지 읽고 나면 허무할 수 있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마음도 다 가짜고 조작된 건가?"


아니, 당신의 사랑은 진짜다. 다만, 그 사랑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 회사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진 환상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 불편한 진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설계도를 모르는 팬은 회사가 "이게 요즘 유행이야"라고 던져주는 대로 받아먹는 **'사육되는 소비자'**가 된다. 하지만 설계도를 아는 팬은 **'감식안'**을 가진다.


"이건 너무 뻔한 기획인데? 양산형이네."

"컨셉만 바꿨지 알맹이는 똑같네. 안 사."

"순위 마케팅 하지 말고 노래 퀄리티나 높여."


회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그들이 만든 '사이비 개성'에 속지 않고 **"진짜 본질(실력, 인성, 음악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눈 높은 팬들이다.


당신의 취향은 소중하다. 그러니 그 취향을 기업의 엑셀 파일에 맡기지 마라. 메뉴판에 없는 것을 요구할 때, 비로소 당신은 '호구'에서 '고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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