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우리 취향을 조종하는 방식
"내 최애는 달라. 걔는 진짜 특별해." "나는 남들 다 좋아하는 유행가 안 들어. 내 취향은 확고해."
지금 뜨끔했나? 미안하지만, 이 챕터를 읽고 나면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가 주체적으로 아이돌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수많은 그룹 중에서 내 심장을 뛰게 한 '운명' 같은 만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70년 전, 독일의 한 까칠한 철학자가 이미 너의 그 운명을 예언했다면 어떨까?
그의 이름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그는 대중문화를 예술이 아니라 **'공장 제품(Industry)'**으로 규정했다. 그의 이론을 빌려 K팝이라는 거대한 공장의 설계도를 훔쳐보자. 당신의 '취향'이 어떻게 엑셀 파일 위에서 조립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K팝 아이돌 그룹을 자세히 뜯어보자. 그룹명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노래 스타일도 다르다. 그런데 이상하게 **'구조'**는 똑같다.
압도적인 비주얼 센터 (입덕 담당)
고음 셔틀 메인보컬 (실력 담당)
동굴 저음 래퍼 (힙함 담당)
귀여운 막내 (씹덕 담당)
리더 (인성/진행 담당)
마치 RPG 게임 파티원 구성처럼, 어느 그룹을 가도 이 역할 분담은 소름 돋게 일치한다. 왜일까? 이것이 바로 아도르노가 말한 **'규격화(Standardization)'**다.
회사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흥행 공식'**을 데이터로 가지고 있다. "비주얼 멤버로 시선을 끌고, 실력파 멤버로 라이트 팬을 잡고, 관계성(케미)으로 코어 팬을 가둔다." 이 공식에 맞춰 연습생들을 레고 블록처럼 끼워 맞춘 것이 바로 아이돌 그룹이다.
우리는 "이번 신인 그룹은 완전 새로워!"라고 환호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건 **'포장지'**가 바뀐 것이다. 내용물인 **'구조'**는 1세대 H.O.T. 시절부터 지금까지 놀라울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회사는 당신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표준 규격에 맞춰 조립해 놨다. 당신은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게 아니라, 잘 짜인 **'표준 모델'**을 구매한 것이다.
"아니야! 우리 애들은 컨셉이 확실해. 세계관도 독특하고 음악 색깔도 달라!"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맞다. 요즘 아이돌은 저마다의 '컨셉'이 있다. 누구는 'Y2K', 누구는 '광야(사이버펑크)', 누구는 '하이틴', 누구는 '이지 리스닝'.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것을 **'사이비 개성(Pseudo-individuation)'**이라고 불렀다. 번역하자면 **'가짜 개성'**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아반떼, 쏘나타, 그랜저. 색깔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르다. 하지만 그 안을 굴러가게 하는 엔진과 부품, 작동 원리는 현대자동차라는 공장에서 만든 똑같은 기술이다.
K팝도 마찬가지다. 청량 컨셉이든, 걸크러쉬 컨셉이든, 그 뒤에서 곡을 쓰는 작곡가들은 같은 풀(Pool)에 있다. 안무를 짜는 트레이너들, 마케팅을 하는 방식, 팬덤을 조련하는 어플(위버스, 버블)까지 모든 **'생산 공정'**은 똑같다.
회사는 아주 미세한 차이(옷 스타일, 머리색, 뮤비 스토리)를 엄청난 차이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골라 먹는 재미"**를 준다. 우리는 A 그룹 대신 B 그룹을 선택하면서 "나는 주체적으로 선택했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건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의 차이일 뿐, 결국 **'중국집 사장(자본)'**이 차려놓은 메뉴판 안에서의 선택이다.
최근 유행하는 **'MBTI 마케팅'**이 대표적인 예다. 회사는 멤버들의 MBTI를 공개하고 캐릭터를 부여한다. "얘는 T라서 시크해", "얘는 F라서 다정해". 우리는 그 캐릭터에 열광하지만, 그것조차 회사가 멤버를 '소비하기 쉬운 캐릭터'로 라벨링(Labeling) 한 결과다. 진짜 그 사람의 복잡한 내면이 아니라, 대중이 소비하기 딱 좋은 '납작한 개성'. 그것이 바로 사이비 개성이다.
가장 아픈 팩트를 찔러보자.
당신은 정말 **'음악'**을 듣고 있는가?
음원 사이트에서 스밍(스트리밍)을 돌릴 때, 우리는 소리를 꺼놓거나(Mute) 이어폰을 꽂아놓고 잠을 잔다. 노래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 **'재생 횟수'**를 올리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이를 **'음악의 물신화(Fetishism in music)'**라고 비판했다. 음악이 가진 본질(아름다움, 메시지, 감동)은 사라지고, 음악이 가진 **'교환 가치(순위, 판매량, 기록)'**만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다.
"이번 곡 별로인데?"라고 생각했다가도, 멜론 1위를 찍고 빌보드에 올라갔다는 뉴스가 나오면 갑자기 노래가 좋아 보이거나, 적어도 "역시 대세는 다르네"라며 내 취향을 수정해 본 적 없는가?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회사는 차트 순위, 초동 판매량, 뮤비 조회수 같은 **'숫자'**를 마케팅한다. 우리는 그 숫자를 소비하며 "내가 1등 가수의 팬이다"라는 우월감을 느낀다. 이 구조 속에서 '음악성'은 뒷전이 된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3분짜리 숏폼용 노래가 판을 치는 이유다. 어차피 팬들은 음악이 아니라 **'성적표'**를 사주니까.
여기까지 읽고 나면 허무할 수 있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마음도 다 가짜고 조작된 건가?"
아니, 당신의 사랑은 진짜다. 다만, 그 사랑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 회사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진 환상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 불편한 진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설계도를 모르는 팬은 회사가 "이게 요즘 유행이야"라고 던져주는 대로 받아먹는 **'사육되는 소비자'**가 된다. 하지만 설계도를 아는 팬은 **'감식안'**을 가진다.
"이건 너무 뻔한 기획인데? 양산형이네."
"컨셉만 바꿨지 알맹이는 똑같네. 안 사."
"순위 마케팅 하지 말고 노래 퀄리티나 높여."
회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그들이 만든 '사이비 개성'에 속지 않고 **"진짜 본질(실력, 인성, 음악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눈 높은 팬들이다.
당신의 취향은 소중하다. 그러니 그 취향을 기업의 엑셀 파일에 맡기지 마라. 메뉴판에 없는 것을 요구할 때, 비로소 당신은 '호구'에서 '고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