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시키는 것이 아닌 스스로 변화하기
(2022년 말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연말 전에 긴 휴가를 내신 팀장님이 돌아오셨다. 그동안 보고해야 될 것도 많고 물어보고 처리해야 될 것들도 있어서 마음이 바빴다. 그런데 팀장님은 오랜만에 출근하셨으니 팀원들하고 차도 한 잔 하고 이야기도 좀 나누자면서 팀원들을 데리고 나가셨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얘길 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팀장님이 긴 휴가를 내게 된 원인인 바로 자격증 시험이었다. 다행히 시험은 잘 보신 것 같다고 한다. 그런 얘길 하다가...
팀장님이 이제 우리 재무팀은 어느 정도 서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안정이 된 거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본인이 긴 휴가를 보내면서 해본 생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들어봐 달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팀장님이 영업부서 소속으로 이동해 영업부서와 재무부서(관리부서)의 중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영업이 이루어져야 물건을 팔고 매출도 생기고 현금도 도니까 영업부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매출을 올리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리스크 관리가 안 될 때가 많다. 그리고 보통 본인들이 해결하겠다고 하다가 잘 안 돼서 관리부서로 일이 넘어왔을 때는 이미 사태가 심각한 경우가 많아 호미로 막을걸 가래로 막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아예 팀장님이 영업부 소속으로 이동으로 해서 직접 영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도 참여해 보고 필요하면 코칭도 해주면서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채권관리도 재무팀에서 하기엔 한계가 있는 게 이미 상황이 많이 어려워진 다음에 재무팀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아서 손실을 최소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차라리 영업단계에서부터, 초기부터 확실하게 하면 문제가 많이 커지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재무팀은 나나 동료 팀원한테 어느 정도 맡겨 놓는다고 해도 루틴 한 건 잘 돌아갈 것이고 여차하면 CFO를 맡고 계신 본부장님이 계시니까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자 팀장님이 너무 대단하다고 느껴져서 박수를 칠 뻔했다. 위에서 그 누구도 부서 이동을 시키지 않았는데, 가만히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냈다는 것. 사실 회사에서는 그런 역할이 필요한데 아무도 맡을 생각도 없고 지금 당장 조직 굴러가기에도 급급해서 그런 자리는 생각도 안 해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팀장님 입장에선 엄청난 도전이다. 이렇게 해서 이 회사에서 입지를 잘 다질 수도 있지만 영업부서 직원들과 적대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팀장님은 미래에 CFO도 생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 다른 회사로 이직할 때 CFO에게 영업 경력이 있다 하는 건 엄청 긍정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게 팀장님이 생각한 대로 잘 안 풀릴 수 있다는 점과(영업부서 직원들의 협조를 많이 받아야 되는데 자기들을 감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영업부서에서 다시 재무팀으로 돌아오는 게 좀 애매해질 수 있다는 즉 본인 자리가 없어질 수 있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만약 팀장님이 영업부서로 이동한다면 난 내가 맡은 업무가 어렵고 이런 건 다 견딜 수 있는데 문제는 CFO이다. 이 분이 인간적으로 나쁜 분은 아니지만 업무적으로는 좀 앞뒤가 막혀있는 스타일이랄까. 분명 일을 하다 보면 설득해야 되는 순간도 있고 할 텐데 어제같이(사실 어제 말이 좀 안 통해서 힘든 일이 있었다) 고구마 백만 개 먹은 답답한 상황만 펼쳐질 거 같기 때문이다.
요즘 느끼는 거는 나는 진짜 CFO 같은 사람만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 CFO가 팀장님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자꾸 둘을 비교하게 되고 팀장님의 일하는 방식을 지지하게 된다. 그건 사실 동료도 똑같이 느끼는 바다.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비교가 되는데 어떡한담. 차라리 이럴 거면 아예 CFO 자리는 내려놓으시고 HR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다고 생각한다.
현재 CFO는 관리, 컨트롤링 중심으로 시키는 것만 하고, 기존 것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편이다. 새 의견을 내거나 말을 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법이 없고 그게 가장 문제를 조용히 잘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팀장님은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고 의견을 제시해서 싸우거나 목소리는 좀 커질지언정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래서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일이 더 스무스하게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서 팀장님의 비호 아래 이런 걸 여러 번 겪고 나니 CFO와 업무적으로 직접 얽히는 게 더더욱 꺼려지고 마는 것이다.
만약 팀장님의 아이디어가 실현되어 부서와 업무를 옮기는 게 회사 입장에서는 꽤 좋은 일이다. 팀장님 개인 입장에선 리스크가 있긴 하지만 누가 말하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그런 업무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하면은 나는 본인이 그 자리에 가면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만들지 않은 커리어를
본인이 만드는 것.
얼마 전 헤이조이스에서 강연을 들었던 구글의 정김경숙 님 사례도 생각났다. 그분도 회사에 이러이러한 포지션이 있으면 좋을 거 같다고 제안했더니 '그 아이디어를 제안한 네가 해볼래?' 해서 수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생각지 못하게 미국 본사에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했는데 대단한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팀장님이 말한 이 포지션을, 이 업무를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내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용기에 감탄했다. 팀장님은 우리들의 반응을 보고 일단은 본인이 혼자서 생각해 본 것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좀 더 생각해 보고 윗선에 이야기를 꺼내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먹힐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아이디어는 윗선에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사장된 아이디어가 될지도.
시간이 몇 달 흐른 지금, 이 아이디어는 윗선에 말해지지 않은 채로 사장되었다. 그리고 팀장님은 다른 꿈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떠나셨다. 나는 여전히 팀장님의 이런 태도는 배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