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내려놓는 벤자민
그 집의 벤자민 나무에서 열매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른다섯 해를 한 화분에서 분갈이 한 번 없이
자라난 나무가 이제 제 몸에 붙어 있던 열매들을
조용히 떨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 년 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믿기 어려웠는데
오늘 몇몇 문우들을 초대한다며 다시 듣게 된 것이다.
조용히 거실 한편에 묵묵히 자리 잡은
벤자민의 나뭇가지와 잎,
그리고 둥근 화분의 테두리마다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단순한 생명력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낸 존재의 존엄을 품고 있었다.
나무 앞에 서니 괜히 말이 줄어들고, 자연스레 고개를 한 번 더 숙이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래된 존재 앞에서 예의를 다해야 할 그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 경외가 일어났다.
-벤자민 열매들-
평소에는 바쁜 일상에 치어 자주 보지 못했던 얼굴들이 오랜만에 둘러앉아 그날만큼은
시계를 벗어둔 듯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며 안부를 나누었다.
식탁 위에 놓인 따뜻한 국수 한 그릇,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치킨, 그리고 서로의 눈빛에 담긴
반가움과 호기심,
그 모든 것들이 한여름 오후의 뜨거운 햇살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야기는 어느새 벤자민에게로 향했고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기네스북에 올릴 사건 아냐?”
“벤자민이 얘기 다 듣는 것 같아.”
“얘가 다 듣고 있을 거야.”
“우리가 자기 말하는 거 다 기억하겠지?.”
순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35년을 함께한 생명이라면 우리의 속삭임과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벤자민 잎사귀에 얼굴을 대보기도 하고 가지에 어깨를 부딪치며 장난을 쳐보기도 하고,
나무 사이로 들여다보며 열매를 따서 깨물어 보기도 했다.
벤자민은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풍경을 품으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여전히 조용히 서 있었다.
한 화분에서 수십 년을 살아낸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실내의 건조한 공기와 뿌리 공간은 분명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주인의 꾸준한 돌봄과 나무 스스로 살아내려는 의지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무는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 확장하며 침묵 속에서 35년의 삶을 지켜온 것이다,
그날의 오후는 짧았지만 오래 마음에 남았다.
단순히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오늘 벤자민이 열매를 다 떨구었다는 이야기.
나뭇가지에 머물던 시간이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와 흙에 소리 없이 인사를 남기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생을 준비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열매란 풍요의 상징이며, 성장의 증표이다.
삶의 절정을 의미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연의 다음 계절을 위한 절정의 빛남이면서 동시에 저물녘의 고요함인 것이다.
한창일 때가 있고, 저물 때가 있다.
그건 나무의 진리이기도 하고 사람의 삶이 품고 있는 가장 순한 법칙이기도 하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정을 조용히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일뿐인지도 모르겠다.
그 집 벤자민은 오늘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비록 열매는 다 떨어졌지만 바람의 방향을 감지하고, 햇살에 고개를 기울이며,
그 자리에 선 채로 묵묵히 계절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나 또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받아들일지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마치 나의 내일을 준비하는 또 다른 열매
하나를 키우는 일과도 다르지 않다.
-35년 한 화분 속의 벤자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