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 김상혁의 2월 <그냥 못 넘겼어요> 북토크
김상혁 시인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장소는 용인의 북살롱벗.
가고 싶었으나, 거리를 생각하니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일 저녁에 왕복 세 시간이 넘는 이동이라니. 망설이고 있던 중, 지안에게 톡이 왔다.
“언니, 저 교수님 북토크 신청했어요! 어차피 다음 날 하루만 출근하면 연휴니까!”
그 말을 보자마자 생각이 단번에 정리됐다. 정말 그렇네. 하루만 버티면 쉰다. 나도 바로 신청했다.
나는 김상혁 시인님을 시인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 그가 나의 스승이고, 내가 그의 제자라는 사실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계속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의 교수님이라서 이 시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아쉬운 면이 있다. 그저 아는 사람이라 추천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뭔가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주 답답하다. 그렇다고 시인님이라고 부르자니 어딘가 어색하고, 거리가 생기는 느낌이다. 겨우 호칭 하나일 뿐인데도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다. 분명한 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에 ‘교수님’이라는 정체성이 포함될 수는 있어도, 단지 교수님이기 때문에 무조건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 왜 좋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투명함?
꼼꼼하게 투명한 사람이라는 점?
수업을 듣고,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나고, 동아리 활동과 학과 일을 함께하며 교수님을 가까이에서 겪어본 시간 동안 느껴온 것이 있다. 교수님은 무언가를 설명할 때 뭉뚱그려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정이 생겼습니다”라고 짧게 말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 사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신다. 그럴 때마다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사소한 부분까지 마음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교수인데’라는 우월감이나 권위 의식이 전혀 없다는 점도 좋았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나는 학우들에게 교수님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을 정말 편안하게 해주셔”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뒤면 내가 실수한 것은 없었는지 되짚어보는 편인데, 교수님을 떠올릴 때만큼은 그런 긴장이나 불안이 없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그럴 수 있죠”, “맞아요”라고 말하며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수업에서도 한결같았다. 아마도 엉망으로 느끼고 해석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데도 그럴 수 있죠, 맞아요, 라고 해주신 덕분에 나는 시를 조금 더 자신 있게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시 읽는 것이 스트레스가 아니게 되었고, 좋아한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교수님 앞에서 조금 더 자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어제 북토크에서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예전에는, 만약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나쁜 짓을 했다면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들이 결국 나를 만들고, 숨기려 했던 것들은 어차피 드러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제는 “어차피 드러날 텐데”라는 생각으로 나쁜 짓은 절대 하지 않으려 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교수님에 대해 투명하신 것 같다, 라고 느껴왔던 감정이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투명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 알고 있는 후지고 수치스러운 면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칭찬을 좋아하고, 칭찬을 듣는 것도 당연히 좋아하지만, 막상 칭찬을 들으면 민망하고 어색하다. 내가 나 자신의 —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 ‘천박한 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칭찬을 받기보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교수님도 비슷하다. 교수님 시가 좋다고, 글이 좋다고 말하면 늘 시큰둥(?)하게 반응하시며, 그건 자신의 시와 글이 좋아서가 아니라 선생님들이 자신을 알기 때문에 좋게 봐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또! 또! 또! 우리의 진심을 몰라주신다! 뭘 더 어떻게 이 진심을 표현해야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도 그런 점이 있기에 이해가 되기도 했다.
물론 작가를 좋아해서 그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글이 좋지 않다면 오래 좋아할 수 없다. 또 글이 아무리 좋아도 작가에게 실망하면, 그 글 역시 예전처럼 읽히지 않는다. 오래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평일 저녁, 집에서의 편안한 시간을 포기하고 다녀온 북토크는 그 모든 이동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북살롱벗 안에 머무는 동안은 바쁨도, 피로도, 복잡했던 마음도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행복했다.
나는 원래 웃음이 많은 편이다. 남들이 웃지 않는 포인트에서도 혼자 웃음이 터질 때가 많다. 북토크 자리에서도 더 많이 웃고 싶었지만, 조용한 분위기라 최대한 참았다. 그래도 몇 번은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순간 라이브 방송 중인데 내 웃음소리가 들어간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톡이 왔다. 웃음소리가 나인 것 같다고.
이미 다 읽은 책이었지만, 교수님이 직접 읽어주시니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분명 읽었던 문장인데도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게 다가오는 감정들이 있었다.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 김상혁의 2월 <그냥 못 넘겼어요>
이 책을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모두 같은 말을 한다. “너무 재밌다”, “귀엽다”. 정말 그렇다. 혼자 읽다가 소리 내어 웃게 될 만큼 유머러스하고, 그 지점이 참 귀엽다. 요즘 귀엽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하셨는데 본인은 절대 귀엽지 않다고. 하지만 귀여움이란 무해한 것이기에 그런 점을 귀엽다고 봐주시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튼 대놓고 ‘나 웃기겠어’ 하고 시작하는 글은 어쩐지 오글거려서 웃음이 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 책은 뭐랄까. 이서진처럼 웃기달까? 또 뭉클하고 놀랍게 솔직하다. 어떤 글은 너무 단 디저트만 계속 먹는 느낌이라 금세 질리기도 하는데 이 책은 달고, 짜고, 맵고, 슴슴한 맛의 균형이 정말 좋다. 그리고 그 균형 또한 모두 의도된 것이었다.
교수님은 이 책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제목부터 목차, 글의 순서까지 책 전체의 구성을 직접 잡고 그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정이 과해질 것 같으면 무게감 있는 글로 눌러 균형을 맞추고, 흐름을 세심하게 조율했다고. 평소에는 무엇이든 편안하고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글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사실 조금 놀라웠다. 당연히 그러셨을 텐데. 지금까지 봐온 모습은 대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묵묵히 따라주는 쪽에 가까웠기에, 그런 의외의 면모에 또 한 번 ‘입덕 포인트’가 추가됐다.
북토크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부끄러운 생각들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셨다. 예전에 이런 천박한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솔직함이 전혀 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공감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면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그것을 그렇게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나는 교수님이 잔디 작가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참 좋다. 주로 공적인 자리에서 뵙다 보니 길게 이야기할 상황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 태도에서 담담하고도 깊은 애정이 전해진다. 그땐 아마도(?) 파주에서 바쁘게? 아님 나른하게? 이 상황을 모르고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잔디 작가님이 귀엽게 느껴진다.
나 혼자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고 학우들 역시 김상혁 교수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 교수님이 꼭 믿어주셨으면 좋겠다. 이제 내 과제를 채점하실 일도 없는데, 내가 굳이 아부하거나 홍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호호.
교수님이 좋아서 이 책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도, 이 책은 정말 좋다.
2월에도 읽고 2월 아니어도 읽기를.
이월되고 이월되기를.
이 책은 김상혁이라는 시인을 정말 많이 닮아 있다.
조금만 말고
조금만 더 사랑해주면 좋겠다.
김상혁 붐은 온다.
붐아 오고 있지?
어디까지 왔니?
뭐? 붐이 안 올꺼라고?
흥, 꺼지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