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식성을 발견하는 재미
한 달 동안 집을 비우면서 가장 탈탈, 열심히 털었던 곳이 있다.
다름 아닌 냉. 장. 고.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는 평소 즐겨 먹지 않는 컵라면을 주식으로 삼으며
냉동실에 얼려둔 부재료를 제외하고 조금이라도 상할 염려가 있는 것들을 먹어 없앴다.
덕분에 집에 돌아와 보니 가장 시급한 곳이 냉장고였다.
평소 배달음식이나 외식을 즐겨하지 않는 편이라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는 건 곧 굶어야 한다는 의미.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표고버섯을 해동시켜 된장국을 끓이고,
묵은 김치와 함께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서둘러 장을 보러 나섰다.
고작 1인분, 일주일 분량의 먹거리인데 5만 원을 쉬이 넘어섰다.
술도 안 샀는데...칫.
카트 한가득 장을 봐왔지만 막상 저녁식사로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난감했다.
빨리 상하는 걸 먹어치우자는 생각에 상추를 씻고 파프리카를 썰었다.
채소가 가득 담긴 그릇을 보니 괜히 뿌듯해졌다.
역시 저녁 메뉴로는 쌈밥이 최고로구나!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기 위해 쟁여두었던 참치캔도 하나 땄다.
10분 이내의 조리를 선호하는 탓에 내 식탁에는
오늘처럼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채소들이 자주 오른다.
샐러드는 물론이고, 풋고추, 오이, 파프리카 그리고 과일까지.
그러고 보면 마트에서 가장 고민 없이 담는 식재료도 과일과 채소류다.
야매 채식지향인으로 살면서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도,
배달음식이나 외식을 선호하지 않는 것도 모두 이런 내 입맛 덕(?).
나만을 위해 요리하고 식탁을 차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런 내 식성을 발견하는 재미가 은근 쏠쏠했다
그런데 오늘.
잡곡의 비율이 1/3 이상을 차지하는 밥을 씹으며,
상추에 파프리카를 싸 먹으면서 문득 알아버렸다.
나 까다롭네.
4계절 내내 생채소를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
간단한 조리에도 안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음식을 선호하는 나의 입맛이
어쩌면 어떤 곳에서는 맞추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네팔에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지면서 음식 탓에 괴로웠다.
평소 입도 길고(똑같은 음식 한 달 먹을 수 있음),
향신료에 거부감도 적은 편이라
외국에서도 한국 음식 없이 잘 지냈다.
못 먹을 정도로 네팔 음식이 입맛에 안 맞는 것도 아니었다.
거의 모든 식당에 채식 옵션이 있기 때문에
초반에는 달밧, 비르야니, 모모 등등을 기꺼이 즐겼다.
하지만 강한 향신료와 기름에 볶고 튀기는 음식들은 날이 갈수록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체류 기간이 2주를 넘어서는 때부터는
현지식으로 한 끼를 먹으면, 다른 한 끼는 샐러드를 먹거나 굶어야 했다.
결국은 스스로 정했던 여행의 규칙.
여행지에서는 가능하면 현지식, 특히 현지인이 가는 식당을 이용하자는
나만의 원칙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관광객 대상 식당을 찾아다니면서 고민했다.
네팔은 왜 이렇게 향이 강하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선호할까.
음식이 잘 상하는 고온다습한 지역일수록 기름에 튀긴 음식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곳 네팔에서도 신선한 식재료를 다양하게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추측과 함께 여행을 마무리지었다.
네팔의 식문화가 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는
한국에 돌아온 지 열흘을 넘긴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신선한 채소 중심으로 구성된 식단은 관리가 어렵고
그래서 샐러드도 비싸다는 슬픈 사실.
그리고
앞으로 누군가에게 내 식성을 소개할 때는 더 이상
‘아무거나 잘 먹는다 ‘라고 하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다.
쓰고 보니 내 식성에는 재미없이, 고됨만 있었다.
계속해서 홀로, 스스로 먹여 살려야 할 팔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