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후 보, 2018
9등분으로 나뉘어 있는 코끼리의 몸. 처음으로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영화가 국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전까지는 이 영화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때때로 그런 영화들이 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정말 제목과 이미지 한 장으로 선택하게 되는 영화들. 나에게 있어 <인 디 아일>과 <해피엔드> 그리고 <유전> 등이 그러한 영화였다. 그리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충동에 가까운 선택에 의해 보게 되는 영화들 중 좋은 영화를 보았을 때 그 감동은 배가 되는 것 같다. 어떤 특별함이 이 영화와 나를 만나게끔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게 될 정도로.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를 본 직후에 이 영화가 얼마나 좋은지, 왜 좋은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주변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SNS에도 관련 글을 몇 번 썼었고 주변에 영화를 좋아하는 지인들에게도 강력하게 극장 관람을 추천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쓰지 못했었다.
단순히 글을 쓰지 못한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다른 영화도 보지 못했고 스스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강한 회의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전에도 여러 번 절망을 느꼈으나 이 영화가 나에게 주는 감정은 뭔가 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한참이 지나 어떻게든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글을 쓰는 지금도 긴장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을 끝까지 쓸 수 있을까. 글을 끝까지 쓰기 위해 영화가 주는 감정을 온전히 전하는 것보다 정말 순수하게 영화를 보았을 때 눈에 띄었던 지점들에 대한 언급만을 하기로 했다. 손이 차갑다. 어찌 되었든 나에게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그런 영화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인물을 휘감는 공기와 같은 카메라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영화는 만저우리에 있는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시작한다. 코끼리는 가부좌를 틀고 동물원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아무런 움직임 없이, 누군가가 제공하는 먹이도 먹지 않은 채 그저 앉아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화자는 푸르스름한, 하지만 그 색이 탁하여 무거운 무게감마저 느껴지는 공간에 앉아있는 한 남자 위청이다. 위청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남자의 얼굴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얼굴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
한기가 느껴지는, 집 안이라고 보기 어려운 다용도실에서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중년의 남성, 왕진도 있다. 얼굴이 굳어 보인다. 차가운 바람은 피부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상반신만을 일으킨 왕진은 굳게 다문 입술만큼이나 움직임 없이 한 동안 앉아있을 뿐이다.
물이 빠지지 않아 넘쳐흐르는 화장실을 처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학생 황링이 있다. 황링은 자신의 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소파에 잠들어 있고 어젯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잠에서 깬 엄마는 황링을 위해 사온 케이크가 망가졌다며 황링에게 화를 낸다. 황링은 망가진 케이크를 먹는다.
폭언을 쏟아내는 아버지를 피해 집에서 빠져나와 불태운 종이를 아파트 현관 천장에 붙이는 남학생 웨이부가 있다. 천장은 불태운 종이가 타들어간 검은 흔적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웨이부는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친구를 돕기로 한다. 친구는 아버지의 권총마저 훔쳐 들고 왔다.
탁한 공기 같은 카메라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탁한 색상이다. 공간을 지배하는 빛깔부터 방 안에 배치된 물건들과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까지 모두 본래의 색에서 채도를 많이 빼앗긴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마치 한 겹의 필터가 쳐있는 것처럼 화면 전체에 탁함이 묻어난다.
네 명의 인물이 주축이 되는 영화는 아주 긴 롱테이크의 화면으로 이야기를 끌어갈 인물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곧 자신들의 상황에 의해 위기에 빠지게 된다. 친구의 자살에 원인이 되거나 사고로 인해 살인자로 몰리게 되는 인물들이 있고 가장 아끼는 존재를 잃거나 가장 가까운 공간에 더 이상 서있지 못하게 되는 인물도 있다.
전반부를 보는 동안에는 마치 카메라가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간과 공간을 오가면서 인물에 도달하기까지 카메라는 공간을 떠다니는데 마치 먼지의 시점으로 공간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한 번에 한 인물에게만 관심을 보이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오는 컷의 경우 그중 조금이라도 비중 있는 인물에게 조금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 안에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 그러하지만 카메라의 포커스를 정확하게 한 인물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인물이 특정한 공간에서 어떤 사건을 맞닥뜨리고 그 사건에서 인물이 무언가의 행동을 취하기까지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을 따라간다. 카메라는 인물과 매우 밀착해 있어 화면 안 가득 인물의 얼굴을 붙잡아두는데 이런 인물을 긴 롱테이크의 화면으로 따라가다 보니 보는 관객들에게도 답답함이라는 정서가 쌓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카메라는 앞서 말했던 인물들이 위기에 빠지는 순간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위기에 발을 들이는 경우는 없다. 다만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아주 작은 실수나 사고, 혹은 무언가의 개입에 의해 인물들은 위기를 맞이한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이 흥미롭다. 위기에 빠지는 순간까지 인물을 가득 잡아 두던 카메라는 인물의 몸을 감싸고돌아 자연스레 인물 OS샷을 형성한다. 영화 속 웨이부(펑 유창)가 자신의 친구를 위해 나서다 불량학생을 계단에서 밀어 넘어뜨리는 장면을 돌이켜 본다.
카메라는 웨이부를 바라보다가 몸싸움이 벌어지는 순간에 잠시 멀어진다. 몸싸움 이후 웨이부가 학생을 실수로 계단 밑으로 밀게 되자 카메라는 웨이부에게 다가온다. 화면 가득 들어찬 웨이부의 얼굴. 그리고 천천히 카메라는 웨이부를 축으로 180도 회전한다. 자연스레 웨이부의 어깨를 전경에 걸친 채 계단 밑에 굴러 떨어진 학생이 후경에 보이는 구도가 완성된다.
이때에도 물론 포커스는 웨이부의 어깨에 닿아있다. 계단 밑에 쓰러져 있는 학생은 포커스가 뭉개져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다른 인물들의 위기에도 마찬가지이다. 인물을 감싸고돌아 인물이 저지른 어떤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방식. 비록 화면은 얼굴 클로즈 업 보다 확장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여전히 인물의 등 뒤에 서있는 카메라는 샷을 확장하여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인물의 등에 붙어 그 숨 막히는 공기를 인물에게 그대로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공기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과 탁한 색상은 결국 탁한 공기와 같은 카메라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고 그로서 관객의 감정을 영화 속 인물들과 동일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후 후반부에 들어서 이 카메라의 변화는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밑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떠나는 것과 주저앉는 것에 대하여
카메라에서 잠시 벗어나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뜻밖의 상황에 의해 한 공간에 있지 못하게 된 네 사람의 하루를 보여준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 (영화에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石家莊北 기차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허베이성의 수도 석가장(스좌장)인 것 같다.)이다.
웹사이트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네 사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웨이부는 학교폭력 가해자를 계단 밑으로 넘어뜨려 죽게 만들었고 왕진은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고자 하는 딸 부부에게 내몰린 상황이다. 황링은 같은 학교 선생과의 원조교제 사실을 전교생이 알게 되었고 위청은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러 친구를 자살로 몰아갔다. 결과적으로 네 사람 모두 자신들의 삶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 서있다.
결과적으로 도시를 떠나는 사람은 웨이부와 황링 그리고 왕진과 그의 손녀이다. 네 사람 중 위청만이 이 도시에 남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곧바로 드는 의문들 중 하나는 왜 하필 위청만 도시에 남았는가이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 코끼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저우리에 있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지고 있는 코끼리. 코끼리는 명백하게 주저앉아있는 상태이다. 주저앉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다. 물론 주저앉아있다는 것은 다시금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긴 하지만 그 가능성에 비해 주저앉아있는 모양새가 너무나 무겁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동물원 안의 코끼리. 먹는 것은 살아간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동물원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정해진 반경에 갇혀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코끼리. 현대사회 속 우리의 모습과도 어딘가 많이 닮아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한 가지 해석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에 어떠한 해석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그 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공고한 방법이기에 나는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 코끼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상황에서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는 네 사람이 각자의 방법으로 그 가혹함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면 세 사람은 도시를 떠나고 위청이 도시에 남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막바지. 웨이부와 황링, 왕진과 그의 손녀는 영화의 막바지에 기차역에서 만나게 된다. 만저우리로 향하는 기차는 취소되었고 늦은 밤이기에 다른 시간대의 기차는 없다. 세 사람은 기차역에서 나와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그곳에서 황링은 만저우리로 직행하는 것이 아닌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 만저우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위에부는 "그건 그때 가서 정하자."라며 일단은 도시를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그런 위에부와 황링에게 왕진은 자신을 두고 가라는 말을 한다. 웨이부가 왕진을 설득하려 하지만 왕진은 이곳을 벗어나도 똑같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을 바라보며 이곳에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이곳의 괴로움을 견디며 다른 곳에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는 게 낫다는 말. 이 세상 모든 곳들이 괴로운 곳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는 그 말에 웨이부는 수긍한다. 낡았지만 웨이부의 옷보다는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웨이부와 왕진은 서로의 겉옷을 교환한다. 그 모습이 세대와 세대 간의 대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아가려는 자와 멈춰있고 싶은 자.
웨이부와 황링은 이 도시를 떠나 어디에선가, 그곳이 만저우리가 아닐지라도 도착해 살아갈 생각을 하지만 왕진은 그 변화를 실행할 힘이 남지 않은 소진된 사람이다. 이 상황에서 왕진의 손녀가 왕진에게 함께 떠나자고 떼를 쓰는 모습은 극 중 어린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동물원에 데려다 달라며 떼를 쓰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극에서 벗어나 바라보자면 또 다른 세대를 위해 소진된 세대가 결심을 하게끔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결국 세 사람은 심야버스에 몸을 싣는다. 웨이부와 황링은 새로운 공간을 찾아 살아가기 위해서, 왕진은 딸 부부가 원하는 요양원에 들어가 그저 살아갈 뿐인 삶을 거부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위해 이들은 움직인다.
위청은 위에부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자신이 친구의 자살과 연관되어 있음을 친구의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위청은 영화 내내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 고백을 통해 그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때문에 위청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자신의 고의적 행동을 통해 공간에 부정을 남기게 된 위청은 그 부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그는 만저우리의 코끼리 얘기를 하며 그 누구보다 먼저 떠나고 싶은 뜻을 내비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영화의 끝에서 자신이 떠나는 것이야 말로 주어진 상황에 주저앉아 순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도시에 남아 잘못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는 삶을 살기로, 그는 마음먹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심야버스의 조명 아래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은 저 멀리 산 너머에서 코끼리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몸을 돌리며 명백하게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심야버스의 인위적 조명 아래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소리가 들리는 산너머를 향해 그들은 카메라를 등지고 바라본다. 뒤를 돌아보는 모양새이다. 그들이 떠나온 자리에 그 코끼리가 남아있는 것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며 뒤에 남은 코끼리도 무언가에 의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내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카메라의 확장 그 영화적 순간
다시 카메라로 돌아와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 후반부 카메라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앞서 말했던 것처럼 234분에 달하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거의 대부분 탁한 공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왕진이 자신의 손녀를 데리고 기차역에 도착해 기차를 타기 위해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나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카메라는 아주 분명하게 변화한다. 조금 더 깨끗한 화면에 샷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준다. 한 명의 인물에 집중하며 흘러가던 카메라가 확장된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기능은 한 인물에게 집중하며 무거울 정도로 답답한 상황에 몰아넣던 카메라가 그 인물에게 다른 인물을 선사하는 것. 두 번째 기능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것을 강요하던 카메라로부터 관객들이 해방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기능과 두 번째 기능 모두 사실 같은 결의 효과를 가진다. 영화 내내 단신의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던 인물들이 결국 누구나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영화를 보는 관객이 그 외로운 싸움은 결국 이 사회의 모두가 행하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네 사람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던 카메라는 확장을 통해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영화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 순간 영화는 커다란 완성에 다다른다. 이 감동은 직접 영화를 보아야만 느낄 수 있다. 확신한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좋았던 장면이나 샷, 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글에서는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들만 최대한 간략하게 적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점점 많아지고 그 큰 이야기를 글로 옮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모습과 동시에 그 사회를 살아가는, 어떻게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마지막 카메라의 변화는 그것을 가장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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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후 보 감독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