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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영 Jun 13. 2024

03. 정신 차려! 울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다학제 진료를 끝내고 회의실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 아빠가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 당장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간호사가 치료 스케줄을 잡아준다고 했다.

'스케줄을 잡고 당장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면 되나?

하지만 난 지금 폐암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데?'

우리 가족은 다학제 진료에서 어떤 항암 약을 언제/어떻게/얼마나 사용할 것인지 등 어떤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예전에 어디선가 '항암을 시작하면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 힘들다'라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항암 약을 쉽게 바꿀 수도 없고, 교수님마다 치료하는 스타일이 달라 치료를 시작하면 병원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늦게 시작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시작하고 싶었다.

단순 감기도 아닌데, 이렇게 휩쓸리듯 예약을 잡고 얼레벌레 치료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병원도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더 큰 병원으로 옮기면 아빠에게 더 나은 치료 방안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선택지를 하나라도 넓히고 싶었다.

일단 아빠와 엄마, 동생에게 조금 신중하자는 의견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신없는 와중에 고맙게도 가족들은 내 말에 동의했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방에 틀어박혀 노트북만 쳐다봤다. 온갖 유튜브와 기사, 블로그 등 클릭할 수 있는 모든 페이지를 클릭하며 폐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네이버에 폐암 환우들 그 가족들의 모임 카페에도 가입했다.

어릴 때 아이돌 팬카페에는 가입해 본 적 있었는데... 환우들과 그 가족들의 카페라니. 좀 낯설었다.

카페엔 어떤 병원의 교수님이 좋은지, 환자에게 어떤 음식이 좋은지, 입원할 때 어떤 걸 준비해야 하는지 등 크고 작은 정보들이 많았다. 전이된 암세포 크기가 줄었다, 수술이 잘 됐다, 완치에 가까워졌다 등 희망이 가득한 글도 많았다. 그들은 다 함께 얼굴도 모르는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런 글 사이사이 [가족을 떠나보내고 왔다]는 내용의 몇몇 글들이 눈에 띄었다.

글을 읽다 보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우리 아빠 돌아가시면 내가 상주인가?'

'부고 문자는 도대체 누구한테까지 보내야 되는 거야?'

'아 우리 집에 남자가 귀한데 관을 누가 들지?'


맞다. 나는 MBTI 파워 N. 생각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타입이다.

왜 부정적인 생각이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생각들이 날 잠시 아빠의 장례식장으로 데려갔다 왔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아빠 걱정에 울어본 적 없는데,

이제와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슬프긴 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냥 창피해졌다.



그렇게 노트북만 쳐다보다가 밤 12시가 넘었다.

다학제진료 후 회사에 출근했던 동생이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돌아왔다.

그러더니 내 방바닥에 드러누워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 너무 슬퍼서 친구랑 술 마셨어. 아빠 죽으면 어떡해..."


늘 그랬다.

어릴 때부터 어떤 일이 닥치면 3살 터울의 동생은 울기만 했다.

언제나 뒷수습을 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건 내 몫이었다.

[K-장녀]라는 타이틀 앞에 자연스럽게 굳어진 성격.

가족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은 언제나 내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짐이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술 마시고 울면 끝이야? 나도 울고 싶어. 나도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울면 상황이 끝나 있으면 좋겠어! 아빠가 다 나아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K-장녀니까. 턱 끝까지 차오른 말들을 억지로 눌렀다.

지금 내 생각을 그대로 뱉으면 분명 자매의 싸움이 시작될 거고, 그럼 엄마의 시끄러운 속이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테니까.



취한 동생을 어르고 달래 방에 눕히고 나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까만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눈물이 났다.

나도 사실은 무섭다. 무서움을 잊으려고 더 정보에 파고든 거였다.

정보를 얻으면 방패라도 손에 쥔 것 같을 줄 알았는데... 그냥 똑같이 무섭다.

부정적인 생각이 날 다시 아빠의 장례식장으로 데려갈 것 같아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래.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어!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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