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 : 사랑과 미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아빠에 대한 내 감정은 딱 한 단어로 요약된다. [애증]
우리 집은 내가 중학교를 올라갈 무렵 형편이 어려워졌다.
아빠의 사업이 쫄딱! 말 그대로 쫄딱!!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빠가 엄마 몰래 끌어다 쓴 사채는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이스피싱까지 당해 없는 형편에 남아있던 몇 백만 원의 돈을 그냥 날리기도 했다. 졸지에 신용불량자 신세가 된 아빠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고 가정주부였던 엄마도 식당 일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연히 집도 이사를 가야만 했다.
부모님은 거실 겸 부엌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고, 나는 동생과 침대 하나 놓기도 빠듯한 좁은 방에서 함께 잤다. 차도 소파도 식탁도 책상도 옷장도 아끼던 피아노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름 부족한 것 없이 자라던 14살 소녀에게 닥친 인생의 첫 불행이었다.
돈과 행복이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분명 돈이 없으면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우리 집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아빠는 힘들다는 이유로 술도 더 많이 마시고 담배도 더 많이 피웠다.
돈 이야기로 밤새 엄마랑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했다.
게다가 아빠는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었다.
엄마 혼자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할 때 가만히 앉아 티비 채널만 돌리는 사람이 바로 우리 아빠였다. 엄마가 없을 땐 그 모든 일이 고스란히 딸인 나에게 넘어왔다.
아빠의 이런 구시대적인 성 역할 고정관념은 내 머리가 커질수록 나를 더더욱 화나게 했다.
'아빠 때문에 집이 이 꼴이 됐는데, 돈도 못 벌어오면서 왜 저러는 거야?'
'아빠가 다 잘못해 놓고 왜 우리한테 소리를 질러?'
'나는 치킨 한 마리도 안 사주면서 왜 아빠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다 해?'
단전에서부터 반발심을 끓어올려 아빠를 한껏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우리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 모든 불행은 아빠 때문이니까. 그리고... 아빠가 미워질수록 반대로 엄마가 불쌍해졌다. 왜 아빠랑 결혼해서 이러고 살아...
아빠 때문에 우리가 이런 좁은 집에서 살고,
아빠 때문에 나는 햄버거 하나를 사 먹을 돈도 없고,
아빠 때문에 엄마가 힘들게 식당에서 일을 하고,
아빠 때문에 나는 불행한 거야!
아빠가 그냥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지금도 후회되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일명 '패딩 사건'이다.
2000년대 후반. 내 학창 시절에 노스페이스, 아디다스 등 비싼 브랜드의 숏패딩이 크게 유행했다. 겨울 교복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패딩을 안 입는 친구들이 없었다. 물론 우리 집은 그 패딩을 사줄 형편이 1도 안 되었지만, 그 패딩을 갖고 싶었다.
그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가난하게 보이는 게 싫어서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던 거짓말쟁이였다.
"아빠랑 엄마 둘 다 회사원이셔~ 회사 때문에 항상 바빠!"
"우리 집은 엄마가 친구 데려오는 거 싫어해서... 너네 집에서 놀면 안 돼?"
"나는 주말에 아빠 차 타고 강원도 놀러 갔다 왔어!"
친한 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것도, 내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창피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부르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가난하지 않은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의 내가 그 패딩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나는 부모님을 조르고 또 졸랐다. 제발 패딩 하나만 사달라고. 하지만 부모님은 돈이 없다고 패딩을 사주지 않았다. 철없던 나는 점점 초조했다. 패딩을 갖지 않으면 꼭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거지 같은 집에서 살기 싫어! 도대체 해주는 게 뭐가 있어!! 이럴 거면 왜 낳았어!!"
패딩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싸우다가... 결국 나는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내뱉었고, 아빠에게 비 오는 날 먼지나도록 맞고 울면서 잠에 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다음날 꼬깃꼬깃한 현금 뭉치를 손에 쥐고 날 백화점에 데려갔다.
사춘기 딸의 비수와 같은 말을 듣고 방구석 어딘가에 숨겨둔 비상금을 꺼내 세어봤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진다. 그래도 최대한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었을 부모님 마음을 그땐 정말 몰랐다. 그냥 아빠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모님의 피나는 노력으로 다행히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형편이 훨씬 나아졌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부터 견고하게 자라난 아빠에 대한 불신과 미움은 어느새 마음 한 구석에 '애증'으로 자리 잡았다. 애정과 증오가 너무 팽팽하게 줄을 잡아당기고 있어 도무지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았다. 애정이 이기려 하면 증오가 힘을 냈고, 증오가 이기려 하면 애정이 힘을 냈다.
아빠가 폐암 진단을 받고 후회했던 또 하나는 내가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너무 자주 했다는 것이다. (사실 어린 맘에 일기장에 빨간색으로 아빠 이름을 죽죽 써 내려갔던 적도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러지 말걸.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과거의 기억들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래서 어쩌면 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효도를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