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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영 Jun 27. 2024

05. 아빠와 단 둘이 하는 첫 외식

아빠가 아픈 후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날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프리랜서인 나는 보통 새벽 2-3시쯤 잠들어 (종종 새벽 2시가 넘어 퇴근하는 날도 있다.)

오전 9시-10시에 겨우 눈을 뜨는 생활 패턴을 갖고 있다.

반면 아빠는 오전 6시 기상, 초저녁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밤 9시에 잠에 든다.

가끔 엘지 트윈스가 야구를 너무 잘하는 날은 취침 시간을 살짝 넘기기도 한다.

생활 패턴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집에 살면서 얼굴 한 번 못 보고 지나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낮 시간에 살갑게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냥 남처럼 지냈다는 뜻이다.


아빠가 폐암 투병을 시작한 시기에 나는 새로운 팀과 일을 하게 됐다. 새로운 팀은 일주일에 2번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재택근무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나는자연스럽게 낮에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낮 시간에 아빠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다학제 진료 후 우리는 다른 대학 병원 초진을 예약했다. 예약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운 좋게 2주 후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2주 사이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 어떡하지?'라는 조금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새로 가는 병원이 폐암 치료로 더 유명한 병원이었기 때문에 불안감은 감수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준비할 서류와 CD, 결과지 등이 많았다.


[준비 사항]

- 신분증

- 진단서(소견서나 진료의뢰서)

- 조직검사 슬라이드 + 결과지

- 영상자료 CD + 결과지

- 평소 드시는 약이 있는 경우 약과 처방전

- 예약 상담 시 안내 서류 (수술기록지, 항암기록지, 방사선치료 요약지)


아빠는 기존 병원에서 항암, 수술, 방사선 치료를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마지막 서류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 날을 잡고 아빠와 함께 병원에 가 필요한 서류를 모두 받았다. 오전부터 서둘렀지만 엄청난 대기 탓에 서류를 다 받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있었다.


"밥이나 먹고 들어갈까?"


나랑 아빠랑 둘이 밥을...? 엄마도 없이 우리 둘이...?

그냥 흔히 하는 일상적인 한마디가 나를 너무나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한 1초 정도 정적이 흐른 후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래 뭐 먹을 건데?"라고 대답했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아빠와 마주 앉아 단 둘이 밥을 먹어본 적이 있나? -없다.

20여 년 만에 아빠와 단 둘이 밥을 먹는 역사적인 날이 오늘? 말도 안 돼. 난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는 걸.

병원은 뭐 택시 타고 와서 원무과 앞에 앉아서 순서만 기다리면 되니까 괜찮았다. 딱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그런 상황들이니까. 근데 밥을 먹는 건 좀 다르잖아! 마주 앉아있으면 무슨 이야기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어떡하지?


아픈 아빠를 걱정하고 챙기는 것과 단 둘이 밥을 먹는 건 나에게 아주 다른 문제였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집 앞 생선구이 집으로 날 데려갔다. 엄마와 몇 번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생선구이를 싫어한다. 날 생선은 좋은데, 구웠을 때 나는 특유의 비린내가 개인적으로 영 별로다.

물론 아빠는 내가 생선구이를 싫어한다는 걸 모르니까 여기로 왔을 것이다. 내 취향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고등어구이 하나와 삼치구이 하나를 주문했다. 사실 나는 알탕을 먹고 싶었는데, 아빠가 고등어와 삼치 중에 고민하길래 하나씩 시키기로 했다. '냄새도 별로고 얼른 먹고 나가야겠다.'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주 앉아 아빠의 정면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자세히 쳐다보았다. (아빠한테 들키지 않게 곁눈질로 쳐다봤다.)

'아빠' 하면 떠오르던 얼굴보다 훨씬 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말라있었다.

아주 잠깐 아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밑반찬이 나오고 생선구이와 솥밥이 나왔다. 나는 밥을 먹으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 통증은 어떤지~ 잠은 잘 자는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괜히 아빠의 몸 상태에 대해 물었다. 반대로 아빠는 딱히 나에게 물음표를 섞어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냥 내 질문에 대답만 하고 밥을 먹었다. 원래도 말수가 없는 편인 아빠는 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질문을 몇 마디 던지곤 이내 밥 먹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생선구이는 맛있었고 생각보다 밥을 먹는 30여 분의 시간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 뿐. 나도 아빠랑 밥 먹을 수 있는 사람이잖아!


남들이 들으면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싶겠지만, 아빠에 대한 애증으로 똘똘 뭉친 나에게 그날은 가히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빠에게 생선구이를 먹었던 그날 어색하지 않았는지 물어볼 생각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음식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싶은 아쉬움이 조금 남긴 한다.




다행히 두어 달이 지난 지금은 아빠와 밥을 먹는 게 꽤나 자연스러워졌다. 밥을 먹으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넬 수 있을 정도? 조금씩 증오보다 애정이 힘을 더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애정 대신 측은함이란 감정이 더 크게 들어와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기름과 물처럼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 부녀가 함께 식탁을 공유한다는 건 꽤 엄청난 변화의 시작이다.


혹시 아빠 한정 마음과 몸(말)이 따로 노는 분들이 계시다면, 단 둘이 밥 먹는 게 너무 어색한 상황이라면, 그래도 침묵 속에서라도 한 번 밥을 함께 먹어보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본다.


아, 그리고 나는 내일 점심에 아빠와 돈가스를 시켜 먹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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