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서른에 접어들면서 청첩장을 받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아빠가 폐암 확진을 받은 3월에도 어김없이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학교 동기 A의 결혼식이었다. 대학교 내내 나는 6명의 동기들과 거의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수업이 끝나면 함께 술을 마시고, 미팅을 나가고, 시험 기간엔 함께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며 밤을 지새웠다.
20대 초부터 꾸준히 서로의 중대사에 함께한 우리는 이번 A의 결혼도 마치 내 결혼인 양 들떠있었다. 브라이덜 샤워에 청첩장 모임에... 몇 달 전부터 꽤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축하 파티를 즐겼다.
결혼식 당일. 다 함께 일찌감치 식장에 도착했다. 신부대기실에서 A와 사진을 찍고, 식이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우린 결혼식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다. 친구의 결혼식을 앞두고 아빠의 투병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터라, 가족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의 질문엔 웃음으로 답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결혼식이 시작되고. A가 아빠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걷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다른 사람들 눈엔 축하의 마음이 넘쳐서 흐르는 눈물로 보였겠지만,
사실 내 눈물의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
내 결혼식에 아빠가 올 수 있을까?
나는 아빠 손 잡고 식장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수도 있겠네.
늦게까지 결혼 안 한 두 딸 때문에... 불쌍한 우리 아빠.
물론 결혼식장에서 꼭 신부가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하란 법은 없다.
그리고 물론 모든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
결혼식장에 양가 부모님이 꼭 다 앉아계셔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간 입장에서 신경이 쓰이는 부분도 아니었다. 내가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는 노릇인데, 갑자기 아빠에 대한 생각을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이다. 분명 축하의 마음만 넘치게 담아왔는데, 자꾸 마음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휘청이는 마음을 누가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한번 울음이 터진 마음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양가 아버님의 축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울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민폐이고 꼴이 이상해질 것 같아 올라오는 울음을 꾹 밀어 삼켰다. A의 결혼식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끝이 났다.
A의 결혼식 이후, 몇 달간 나는 결혼식 참석을 최대한 피했다.
A의 결혼식은 아빠의 폐암 확진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있던 결혼이라 더 마음이 요동쳤던 것 같지만, 어쨌든 결혼식장에서 아빠 걱정이나 하며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난 지금.
아빠의 항암이 진행 중이고, 나도 아빠의 병을 인정하고, 간병 생활을 하다 보니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다.
지난주에도 친구 결혼식에 다녀왔다. 울지 않고 씩씩하게 친구의 앞날을 축하해 주고 왔다. 너무 먼 미래의 일은 걱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하루하루 아빠가 지금처럼 잘 버텨주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럼 뭐 나 결혼할 때 아빠가 축가라도 불러주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