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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신애 Sep 22. 2021

책 속으로 다녀온 여름 휴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북리뷰 #여름은오래그곳에남아 #일본여행다녀온듯 

마쓰이에 마사시 저, 김춘미 옮김, 2016년 김영사 


1.

올해는 유난히 번잡스러웠다. 상대도 없는 전쟁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날 안쓰럽게 여긴 그녀는 이따금 내게 안부도 묻고, 비영리 조사에 대한 팁도 묻고 하면서 지친 나의 내면을 달래주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 내 마음의 작은 고마움을 이리저리 표현했는데, 그에 대한 화답으로 그녀는 여름 휴가를 떠나면서 책을 한 권 선물해주었다. 휴가도 떠나지 못하고 굴레에 매여있는 내게 마음의 도피처라도 소개해 주듯이. 


2.

내가 그만큼 간절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에 꼭 끝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를 내가 알기 때문에 밑도 끝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 요즘같은 상황은 정말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혼자 날뛴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조금 더 멀찍히 떨어져 나 자신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당장 읽어야 할 책 목록 중에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피서같은, 그녀가 선물해 준 책을 골라 추석명절 동안 읽어보기로 했다.  


3.

소설인데도 건축과 예술, 전문적인 지식을 잔뜩 구겨넣고 일본인 특유의 자잘한 묘사와 낯선 지명들을 수시로 언급한 덕에 처음 몇장은 집중해서 읽어야만 했다. 결국 나는 구글지도를 열고, 등장하는 일본의 지명들을 일일히 확인했고 이따금 눈에 거슬리는 낯선 한자표기나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등장할 때면 아예 사전을 열고 읽기 시작했다. 유명한 건축가의 이름과 예술가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구글 검색을 통해 그 심미적 감성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얼마간의 노력 덕에 이내 나는 이야기 속으로, 더 정확히는 그들이 머물던 여름별장의 일상 속으로 빠져들었고 더 이상 구글이나 사전따위는 필요가 없어졌다.   


4.

숲 내음, 나무 사이에서 들리는 새소리, 나무의 향기, 장작 때는 풍경, 숨소리도 나지 않을 적막이 흐르는 집중력, 아름답게 설계된 별장에서의 물흐르는 듯한 일사분란하고 정돈된 일상의 움직임들, 사소하지만 서로에 대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분위기 등을, 나는 그보다 밖에 서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

눈에 그려질만큼 자세하게 묘사된 덕에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의 등장인물들은 내가 원래 알던 사람들 같았고, 하루하루 벌어지는 잔잔한 사건들을 따라가면서 어느새 나는 아사마 화산의 기슭에서 자연을 벗삼아 나만의 목표를 추구하는 한 사람으로 그들의 대화에 나지막이 공감하고 있었다. 


6.

"노래한다는 것은, 즉 숨을 쉬면서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 손놀림이 가벼웠을 거야. 사람은 말이야. 그냥 의자에 앉아 있을 때조차 어깨에 힘이 들어가거든. 그렇지만 숨을 쉬면서 몸의 긴장을 풀면, 어깨에서 힘이 빠지지. 호흡을 편히 하면 어깨도 굳지 않아." 


7.

이렇게 중간중간 등장하는 대화들에 밑줄을 치곤했다. 읽는 동안 내 마음에 울림이 있는 대목에 나는 그렇게 줄을 치며 천천히 곱씹어 읽어내려갔는데, 그렇게 모인 글귀들이 제법되었다. 줄친 글귀들을 모아놓고 보니 지금 내 심리상태에 딱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나는 듣고 싶은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있는 셈이군'이라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8.

이틀간 나는 사카니시 군과 함께 여름별장 속의 고요한 다이나믹을 가슴 졸이며 느껴보았고, 계수나무 잎이 햇살에 반짝이는 그 여름의 산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일본을 다녀온 듯하다. 내일이면 나는 금방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건축과 자연과 사랑과 삶에 대해 주인공들이 늘어놓은 말들에서 주워담은 지혜와 위로는 당분간 내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추석 휴가를 아사마 화산 기슭으로 다녀왔다. 아마도 나는 이따금 멀리 떠나고 싶을 때, 이 책을 들고 동네 카페 구석을 찾아가 조용히 사색에 잠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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