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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야매 Jul 18. 2019

유혹의 감자칩

감자칩 한 봉지를 위한 합리화

며칠 전에 감자칩 한 봉지를 뜯었다. 천천히 두고 일주일은 먹을 요량이었다. 패밀리 사이즈라고 적힌 나름 큰 봉지여서 굳이 무리해서 한번에 다 먹어 치우고 싶지도 않았고, LA의 건조한 날씨 덕택에 천천히 먹어도 눅눅해지지 않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감자칩의 칼로리를 생각하면 한 봉지를 앉은 자리에서 다 비운다는 것은 거대한 죄악이기에 나의 지방 건강 상태를 위해서라도 조금씩 나누어 먹는 게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뜯은 봉지 안에는 감자칩이 두둑히 들어 있었다. 질소 포장이니 뭐니 해도 처음 뜯었을 때는 나름 묵직하다. 마음이 풍요로워 진다. 양이 많으니 조절하며 먹으면 일주일은 물론 2주도 충분히 먹겠다 싶었다. 그러나 아뿔싸, 먹다 보니 마음처럼 되지를 않았다. 영화를 보여 한 줌 두 줌 퍼먹다 보니 어느새 봉지 안이 거의 비어버린 것이 아닌가.


일주일 간의 간식을 1시간 만에 비워버린 순간이었다. 풍요롭던 마음이 순식간에 홀쭉해졌고 이윽고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칼로리를 낮춘 구운 감자칩이었다고 해도 그 커다란 봉지를 영화 한편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 먹어 치워버리다니. 안 그래도 운동이라고는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몇 발짝 걷는 일 밖에 하지 않는데, 살이 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먹은 것을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식증 환자처럼 변기에다 게워내고 싶지는 않으니 그냥 다음부터 조심하기로 다짐하고 오늘은 스스로 한 번 봐주기로 했다.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그리고 어제, 마트에 갔다가 감자칩 한 봉지를 홀린 듯이 또 사버리고 말았다.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전에 먹은 감자칩은 구운 감자칩이라 칼로리가 낮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먹으면서 이 사실을 자꾸 의식하다 보니 맛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어딘가 아쉬운 그런 느낌이었다. 보통 몸에 좋은 것은 입에 쓰고 몸에 나쁜 것이 맛있다는 통념을 머리 속에서 지우지 못한 죄였다. 이번에는 튀겨서 기름지고 더 감칠맛나는 감자칩이 먹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마트에서 고칼로리 감자칩을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집어 들게 된 것이다.


문제는 집에 와서 이 감자칩의 처리 시기를 결정하려고 할 때 발생했다. 그 전날에도 이미 감자칩 한 봉지를 해치웠는데 오늘 또 감자칩 한 봉지를 더, 그것도 칼로리가 훨씬 높은 버전으로 먹어 치운다는 것은, 나의 복부 내장 지방상태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타협 및 조정 과정을 거친 결과, 최소한 사나흘은 기다린 후 그때 가서 천천히 먹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금지된 것이 더 탐스러운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열어보지 말라면 괜히 궁금해서 열어보게 되고, 먹지 말라면 괜히 자꾸 생각나서 먹게 된다. 판도라의 상자와 이브의 사과가 그렇게 열리고 먹혔다. 나 또한 인간인지라 금지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자꾸만 바삭하고도 짭조름한 그 맛이 그리워 감자칩 봉지에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결국 오늘도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어쩔 수가 없는 유혹이었다. 살이 좀 찌면 어떻기에 이렇게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그쳐야만 하는지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다. 입은 행복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죄책감이 나를 옭아맸다. 남들은 어떻게 길티 플레져를 즐기는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그냥 길티일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손과 입을 멈췄다는 것은 아니다. 계속 먹되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는 말이다.


감자칩 봉지 안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입 안으로 미끄럼틀 태우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는 감자칩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감자칩을 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어쩌면 감자칩을 먹는 행위와 나의 복부 지방이 부푸는 일 사이에는 커다란 양의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자칩을 먹는 행위에 죄책감에 고통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참고: 팩트다


구운 감자칩을 먹으면 살이 조금은 덜 찌지 않을까 하는 쪼잔한 생각 중

그래도 조금은 참아냈으니까 위안을 삼으련다. 산 꼭대기로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못 이겨낼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이겨 내보려고 노력한 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마 앞으로도 같은 일이 반복될 테다. 또 다시 감자칩에 유혹 당하고, 그 유혹을 참아내려 고뇌하고, 그러나 결국에는 유혹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참아내려 아등바등 대고, 또 한 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나를 받아들이겠다. 바삭한 감자칩에 유혹 당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그에 따라 흔들리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유혹을 참아내는 일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유혹에 무너지는 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게 내가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더 나아가, 어쩌면 이것이 나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리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유혹의 감자칩 앞의 나약한 나를 숭고하게 받아 들이며 오늘도 일용할 감자칩을 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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