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의 원문은 ‘Tomorrow is another day’다. ‘내일은 새로운 하루’라는 뜻이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지만 시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시간이라는 이 어려운 주제는 책(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애슐리가 남북전쟁 전의 남부를 그리워하며 좋았던 날들이 (아마도 바람과 함께) 전부 사라져 버렸다고 탄식할 때마다 스칼렛은 말한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애슐리. 과거의 기억이 당신을 삼켜버릴 거예요.’ 평생의 사랑이자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한 레트가 떠나버린 뒤에도 스칼렛은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새로운 날’이라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실체가 없고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흘러 가버려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이 크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억척스럽게 익지도 않은 무를 뽑아먹으며 다시는 운명에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강인한 스칼렛을 사람들은 동경하지만 시련이 닥쳐오면 신경쇠약에 걸려 몰락해 가는 블랜치(비비언 리의 또 다른 아카데미 수상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여주인공)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일은 새로운 날이지만 그렇게 마음 먹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거나 과거에 겪었던 상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거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일이라는 그 새로운 날에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무엇을 예측하건 100% 확실한 것은 없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일이 새로운 날이라는 것만큼은 역설적이게도 100% 사실이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시간이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것을 중심축에 두고 사고하는 스칼렛의 태도는 매우 현명하다고 볼 수 있다.
2. Bluestocking
스칼렛은 남자가 똑똑한 여자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순진한 얼굴로 위장하여 어찌하면 남자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고 그 날카로운 두뇌의 활동을 감출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
왜 남자란 그런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그러한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건 수학의 공식 같은 것으로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수학은 그녀가 학교 다닐 때 가장 손쉽게 획득한 과목 중 하나였다.
소녀 시절 스칼렛이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는 애슐리였다. 스칼렛은 어느 날 멜라니가 애슐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bluestocking!’ 이라는 탄식까지 내뱉는다. ‘bluestocking’은 아는 척하는 여자 내지는 문학 소녀라는 뜻인데 멜라니는 애슐리에게 그런 깊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스칼렛은 멜라니가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하수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비웃는다.
스칼렛은 수학을 잘했지만 당시에는 수학을 잘하는 것이 여자답지 못한 일로 여겨졌었다. 또 여자가 사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는데 스칼렛은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일로 스칼렛은 이웃들의 엄청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수식을 들먹이며 어떤 게 더 이득이 되는지 설명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여자가 돈을 잘 버는 것도 모자라서 수학까지 들먹였다가는 매장을 당할 게 뻔해서 꾹 참는 장면이 나온다.
3. 북부는 왜 전쟁을 일으키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을까
이 책은 남부 사람의 입장에서 쓴 책이고 노예제도를 폐지 시킨 북부를 적으료 묘사해서 출판 당시에도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저자인 마가렛 미첼은 그런 의도로 책을 쓴 것이 아니며 흑인들은 좋은 사람이라고 항변했지만 비난을 씻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이 책은 단편적으로 남부와 북부 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한다기보다는 전에 다른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남부와 북부의 장단점을 깊게 파고든 부분이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스칼렛은 북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교제하기 시작한다. 이웃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양키들)이라면 치를 떨었고 이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을 변절자 내지는 배신자로 취급했지만 스칼렛은 사업 확장을 위해 북부 사람들에게 아부도 하고, 비위도 맞춘다. 어느 날 스칼렛은 북부 출신의 어떤 여자가 보모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여자에게 좋은 흑인 보모를 구해주겠다고 제안했더니 북부 여자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흑인 따위는 신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스칼렛은 놀라서 흑인을 해방시킨 건 당신들이 아니냐고 묻는다. 스칼렛은 남부 사람이지만 흑인을 더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인들을 훨씬 더 신뢰하고 있었다. 흑인에게는 아무리 고생을 시켜도 배반할 줄 모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충실함과 인내심과 애정의 미점이 있었다. 스칼렛은 엘렌과 자기와 웨이드를 섬기느라 거칠대로 거칠어진, 다정하고 마디가 굵은 마미의 손을 생각했다. 이런 타관내기들이 어떻게 흑인의 손 같은 걸 알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상냥하고 얼마나 위안이 되며 얼마나 적당히 어루만져 주고 토닥거려 주고 얼러 주고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지 이 따위 것들을 알 리가 있겠는가.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저들은 흑인들을 해방시켰지만 흑인을 좋아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물론 모든 북부 사람들이 흑인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레트 버틀러라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북부가 흑인 해방을 내세운 것은 흑인을 북부군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남북전쟁의 병력을 확충하고 남부의 농장 노동력을 초토화시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다고.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북부는 선이고 남부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기 쉽지만 북부 사람들의 그런 선택도 마찬가지로 이권을 위한 것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차이는 꼭 우리나라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스칼렛의 의식 구조 속에서 흑인은 하인이나 노예처럼 자기보다 한 단계 낮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스칼렛은 흑인들을 자기가 안고 가야 할 식구, 책임져야 할 사람들로 여기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경제 공동체로서 의식주를 책임지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에 비해 북부는 이미 산업화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남부 사람들은 공동체 간에 결속력이 남아 있어서 누군가가 굶고 있으면 반드시 이웃이 나서서 도와준다. 스칼렛은 일가 친척들뿐만 아니라 뒤에서 욕하고 수군거리는 이웃들까지(비록 관습이라 마지못해서긴 하지만) 꾸준히 지원하고, 다른 이웃들도 정확히 그와 같이 행동한다. 반면 북부 사람들은 똑똑하고 실용적이고 인권의식과 시민의식이 월등하지만 도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약삭빠르고 이득을 위해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해 남부 사람들은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가 최고라는 아집에 사로잡힌 곰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구시대의 유물로 희화화되어 있다. 남부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과 달리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그런데 남부에는 일종의 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미가 아직 남아 있다. 또 남부 사람들은 약자를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며 강한 책임감을 보인다. 남부 신사들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주체로 보기 보다는 보호 대상으로 간주하는 기사도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스칼렛은 이 기사도를 이용해먹으면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남부에서는 부인이 신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신사가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인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구나 용납되지 않았다. 다른 재목상들은 고작 속으로만 분통을 터뜨리고 가족들이 있는 데서나 분개하는 정도로, 아쉬운 대로 5분만이라도 좋으니 케네디 부인(스칼렛)이 남자가 되어주었으면 하고 억울해했다.
스칼렛은 제재소를 차린 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사들을 제치기 시작했다. 자기만 빼고 모든 사업주들이 남자지만 남부 신사들은 약한 여자에게 남자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자니까 좀 더 보호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칼렛이 아무리 부당한 짓을 해도 항의조차 못하고 속만 끓일 수밖에 없었다. 남부는 가부장적이지만 그만큼 많은 책임을 지는 입장을 보이고 북부는 흑인 해방을 외치듯이 여성 해방을 외친다. 북부 남자들은 여성을 동등하게 대우해 주는 만큼 기존의 무거운 책임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레트 버틀러는 남부 사람이지만 자기가 속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트는 자신은 의리나 명분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며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스칼렛 역시 자기처럼 못돼먹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남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낭만적인 환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남부 사람들이 몰락할 때도 이 두 사람만은 계속해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애슐리는 자꾸 뭔가가 사라져 버렸다고 중얼거린다. 말 그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사라진 것인지는 끝끝내 설명하지 않지만 애슐리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남부 특유의 실리보다 명예를 추구하는 태도, 정신적인 고결함 같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인 듯하다. 그러나 그 고결함은 누군가의 노예 노동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반면 북부는 흑인과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더 이상 2등 시민으로 무시 당하지 않고 백인 남성과 똑같이 대접 받으면서 스스로 직업을 찾고 가족을 꾸릴 수 있는 선택권을 준 셈이다. 물론 이것 역시 이타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식의 명분을 내세워서 표를 받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이다.